입버릇처럼 『공직자는 공직에 있을 때 쓰러지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말해온 공직자가 있었다. 중병을 앓으면서도 자신이 맡은 공무수행에 전력하다가 마침내 일이 성취될 즈음 자리에서 물러나 유명을 달리한 공직자가 있었다.
북한 관련 정보분야의 일인자로 1994년 남북정상회담 실무접촉 주역이었던 엄익준 전 국가정보원 제2차장, 그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까지 혼신의 삶을
엄씨는 지난해 2월 간암 판정을 받고 투병을 계속해왔지만 남북정상회담 성사라는 역사적 과업을 앞에 놓고 개인의 병치료에 매달릴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회담의 정지작업이 한창이던 지난 4월 초에 그는 이미 간과 폐에 암이 전이된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북측으로부터『회담을 하자』는 소식이 올 때까지 통증을 참아내며 마지막 마루리 작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북에서 소식이 온 이틀 뒤에 그는 사표를 내고 병원으로 실려갔고, 입원 후 채 한달도 안돼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공직이 무엇이길래 치료를 제쳐놓고 업무에만 충실했을까. 교민들에게서 금품을 받은 뒤 퇴임한 전 과테말라 대사나 카지노 도박으로 거액의 빚을 지고 소환된 주 이스라엘 대사같은 공직자도 있는데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에서 열연하다 쓰러져 죽은 연기자의 삶에 감동한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다간 이들의 삶에 경배한다.
무엇 때문인가. 평생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한가지 일에만 매달리는 외길 인생의 천직의식 때문이다.
평생을 한결같이 나환우를 위해 몸바치고 세상을 떠난 성 라자로마을 원장 이경재(알렉산들) 신부님과 같은 성직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연초에 개봉된 일본영화 「철도원」의 감동도 바로 그런 것이리라.
가족보다 직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나 일생동안 한가지 일에 종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주인공의 천직의식이 엄익준 전 국가정보원 제2차장의 공직관과 닮았다.
오로지 한 길 걷는 이들
「철도원」의 주인공은 아내가 숨을 거둘 때는 물론 고명딸이 죽었을 때도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 가장으로서의 절제를 보여준다. 자식이 죽어서 돌아올 때도 깃발을 흔들며 맞이했던 간이역의 역장 오토마츠가 끝내 눈 덮인 플랫폼에서 철도원으로서의 한 평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는 가치나 정서를 돌이켜 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를 보며, 가톨릭신자였던 엄익준 전 차장의 죽음을 지켜보며 해묵은 가치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리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가족보다 직장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느냐, 직장 옮기는 것이 흠될 것이 없는 세상에 무슨 외길 인생타령이냐 할 것이다.
또 엄익준 형제님의 순직을 보며 발병한 사실을 알았으면 우선 병부터 치료한 뒤 공직에 복귀할 것이지 왜 그렇게 고지식하고 답답하냐 할 것이다.
물론 시대가 달라졌다.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는 외길 인생이 푸대접받고 퇴출당하는 시대다.
더군다나 우리는 IMF한파에 휘말려들면서 직장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평생직장으로 알았던 회사는 구조조정이란 구실로 사원들을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내몰았다.
회사 일보다는 끊임없이 한눈 팔던 사람들은 어쨌든 살아남았고, 미련할 정도로 회사 일에만 매달렸던 모범사원들은 노숙자나 실직자 신세사 되어야 했다.
지금도 직장을 뿌리치고 떠나는 전직 러시는 계속되고 있다.
과연 직장 동료간의 끈끈한 유대나 우정, 회사에 대한 끝없는 충성 등 지금까지 우리가 미덕으로 알았던 가치들은 무의미한 것일까.
회사보다는 나를, 이웃보다는 내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타산문화가 신세대가 추구하는 이상일까.
사계의 권위자요,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은 말끝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개척정신과 모험정신이야말로 우리가 터득해야할 21세기적 삶의 지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우리의 정치판이 우리의 경제계가 오늘처럼 혼란스러운 것은 내노라하는 이들에게 직업정신이나 천직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엄익준 형제님은 죽음을 앞두고 e-메일을 통해 『국가정보기관 직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사명감이며 개인보다는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유언으로 직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공직자들이 성실 복종 친절 공정 비밀엄수 청렴 품위유지 등 국가공무원법이 부과한 의무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시대에 한눈 팔지 않고 살다간 그의 외길 인생은 공직자의 귀감으로 오래 기억되어야 하리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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