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아복제, 유전자 조작, 안락사, 낙태와도 같은 단어들이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매스컴을 통해 접하게 되는 이러한 문제들은 이미 결론이 나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하고 이제 더 이상 토론의 여지도 없는 사회 분위기이다.
편리함과 유용함만을 중시하는 현실이 애써 윤리적 논쟁을 비껴 가게 만든다. 그러한 문제들이 인간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에도 그 이익과 편리함을 고려할 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기본 가치에 대한 질문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전대미문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지금까지 하느님의 영역 이라고 철저히 믿어왔던 인간 생명의 영역에까지 깊이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이식을 위해 필요한 장기를 쉽게 만들고, 고통 없이 자는 듯 죽게 만들고, 경제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쉽게 낙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인류의 삶을 아주 편하고도 실질적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떠들지만 과연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은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하나의 실존적 고뇌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사랑하며 이를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생명 문화의 건설이다. 인간은 현세적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이 생명의 숭고함은 현세적 삶에서도 위대함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모든 것을 살아 숨쉬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따라서 인간 생명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알려준다. 인간 생명은 인간의 능력이나 기술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주인이 아니다. 다만 생명의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하느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선사된 생명을 잘 보호하고 가꾸어나갈 책임과 의무는 매우 막중하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것,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물론, 실험실에서 인간생명을 조작하고 만들고, 폐기시키는 것까지도 모두 생명의 관리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자신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신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계획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