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지리산 일대를 돌며 명찰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화엄사, 쌍계사를 거쳐 송광사에 들렀을 때였다.
송광사는 10명의 고승이 날 것이라는 예언대로 그야말로 장중하고 묵직한 절터에 분위기가 매우 안정적이어서, 방문객으로 하여금 절집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학승들의 공부의 기운을 덧입게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절집 마당 한 쪽에선 젊은 학승 서너 명이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야! 넌 낙엽을 쓸라는데 낙엽은 안 쓸고 웬 모래 바람 만 일으키냐?』그들의 장난기 어린 농담이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살처럼 생동감 있게 들려왔다. 날렵하게 뻗어 올라간 겨울추녀 끝으로 잎을 다 떨군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앙상한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넉넉한 까치밥이 스님들의 넉넉한 인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탱화 전시실에 들러 1300 여년 전 신라인이 조각했다는 「목조삼존불」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있는데 조카 가 다가와 화장실에 가야겠단다.
조카의 손을 잡고 나와 전시실의 안내인이 일러주는 데로 찾아가니, 화장실은 보이지 않고…. 다시 돌아 나오는데, 『이모, 여기가 화장실인가 봐!』
조카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보니 「세상에!」 나는 지금까지 그 어디서도 송광사의 화장실처럼 멋진 곳은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절 안의 다른 건물들과 다름없이 단청이 아름답게 그려진 우아한 한옥이었는데 연못을 가로지르는 구름 다리를 건널 때만 해도 도저히 화장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운치 있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특이한 건축 구조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배설물의 처리조차 매우 자연동화적인 스님들의 지혜와 수고에 감탄과 찬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화장실 내부에 들어가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바닥에는 사람의 배설물이나 휴지 등이 전혀 보이지 않고 낙엽만 수북히 깔려있는 것이다. 아마도 스님들이 수시로 해우소에 들러 낙엽을 그 위에 뿌리는 모양이다. 휴지는 휴지통에 모았 다가 따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뭇잎과 함께 뒤섞어 퇴비를 만들어 쓰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자연 친화적인가!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선방 안에서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깨달음만 구하는 줄 알았더니, 스님들은 치열한 공부와 섬세한 감각으로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몸으로 터득하고 삶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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