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는 가슴이 시리다. 찬이슬이 내린다는 「한로」 지나고, 서리를 몰고 오는 「상강」 지나 11월의 달력 앞에 서면 휭하니 찬바람이 지나는 듯 한기가 느껴진다. 지난 여름 그렇게 요란스럽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울음도 끊기고 새떼들도 황망히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건성건성 살아온 세월이 또 한구비를 돌아가는 가보다. 이기고 지는 사람들의 일에야 무심히 살아왔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 덩그렇게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고 있노라면, 모두가 순리대로 바뀌어 가는 대자연의 질서 앞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왜 사람들은 늦가을 들녘에서 비어있는 만큼의 넉넉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입동 무렵 찬바람이 파고드는 창가에 앉아 성현들의 말씀이 담긴 낡은 책장을 다시 펼쳐본다.
쓸데없는 것의 쓰임새
질그릇을 보라. 질그릇은 속이 텅 비어 있다. 때문에 거기에 물을 담고,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벽을 뚫고서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방이라는 것은 그 안에 비어있는 공간이 있어야 방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있는 것으로 이로움을 삼고 없는 것으로 작용을 삼는 것이다. 「노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쓸데없는 것의 쓰임새를 일깨워주는 제자백가의 가르침이 얼마나 오묘한가. 이처럼 쓸모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쓸모 있는 것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거늘, 어찌 사람들은 그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일까?
고대 중국의 대혼란기라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에 많은 사상가들이 생겨나고 활약하며 그 뜻을 오늘에 전하고 있음은 참으로 놀랍다. 노자가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가졌던 반면 장자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 오히려 무사태평으로 생을 즐기고 있다는 예를 자주 들어 인간의 허망한 오만을 비웃고 있다. 「인간세」에 나오는 상수리나무 얘기는 장자의 철학으로 곧잘 인용되는 대목이다. 남백자기가 놀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되었다.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천 대라도 그 나무 그늘에 묻힐 만큼 컸다.
그는 그 나무가 틀림없이 좋은 재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러러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나무는 온통 꾸불꾸불해서 서까래를 놓는 나무나 들보로는 도저히 쓸 수 없음을 보게 된다. 또한 굵은 나무 둥치를 보았으나 속이 텅 비어 널나무로도 쓸모가 없는 것을 알았다. 잎새마저 독이 있었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남백자기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건 역시 쓸모가 없는 나무다. 그러나 덕분에 이렇게 클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신인(神人)으로 불리는 덕이 지극한 사람이 그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도 이 쓸모 없는 나무의 도리와 같은 것이리라』 쓸모 없는 나무가 오래 산다는 장자의 우화에는 많은 교훈이 담겨있다. 『덕은 명예욕 탓으로 탕진되고, 지식은 경쟁심에서 생긴다. 명예욕은 서로 헐뜯는 것이며 지식이란 서로 다투기 위한 수단이다』
행복은 텅 빈 곳에
명예욕을 탐하는 사람은 덕을 갖춘 척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는 덕이 있으면 사람이 모여든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사람의 그러한 심리를 이용하려 하고 수작을 부리게 된다. 또한 그 덕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고까지 믿는다. 그러나 그런 덕을 팔아서 정말 명예를 살 수가 있을까? 겨울이 다가오는 늦가을의 텅 빈 들녘을 보라! 여름날의 무성했던 잎들을 버리고 성자처럼 서 있을 나무들을 보라. 그들만이 정직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저 텅 빈 것을 잘 보라. 텅 빈 방에 햇빛이 비쳐 밝지 않은가. 행복은 텅 빈곳에 머문다』 햇볕 드는 창가 텅 빈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 행복을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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