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오늘도 밀가루 봉지를 소중히 감싸 안고 등교 길을 나선다. 그는 밀가루 봉지에 모자를 씌우고 예쁜 스웨터도 입혔다. 차에 오르자 에릭은 조수석에 놓인 베이비 시트에 밀가루 봉지를 조심스레 앉힌 뒤 안전벨트를 채웠다. 운전 중에도 그는 심심찮게 밀가루 봉지를 살펴본다. 밀가루 봉지와 함께 생활한지 어느 새 보름이 넘었다. 밀가루 봉지는 단 한 순간도 에릭의 손을 떠난 적이 없다. 이렇게 매일 함께 생활 하다보니 이젠 정말 밀가루 봉지가 자신의 아이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에릭이 애지중지하는 밀가루 봉지는 실은 가상의 아기이다. 미국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에는 아기를 기르는 실습 프로그램이 있는데, 아기는 3㎏ 정도의 밀가루 봉지나 계란으로 대치된다. 어쨌든 에릭이 받은 것은 종이봉지에 담긴 밀가루였다. 선생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은 날로부터 한 달 동안 에릭은 밀가루 봉지를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녀야 한다. 학교에 갈 때는 물론이고, 수업 중에도 옆자리에 앉혀두어야 하며 짓궂은 친구들이 밀가루 아기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잘 보호 해야 한다. 방과후에 축구를 하거나 파티에 참석하거나 또는 쇼핑을 갈 때도 물론 밀가루 아기를 데리고 다녀야만 한다. 그리고 밀가루 아기를 데리고 다닌 내용을 매번 봉지에 써넣은 다음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한다. 운 나쁘게 예기치 않던 비나 눈이 와서 밀가루 봉지가 젖거나 자칫 잘못해서 떨어 뜨려 봉지가 터져버리면 낙제 점수를 받게 된다.
에릭은 지금 마음에 드는 클라스메이트가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할 능력이 생기면 그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예쁜 아기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 그러므로 밀가루 아기를 돌보는 에릭의 손길은 서툴지만 마음은 매우 진지하다 흔히 미국이라는 사회는 성개방풍조로 인해 미혼모도 많고 생명 경시 현상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등학교에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는다면 어느 누구도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성이나 생명의 문제에 대해 이런 실습을 할 기회가 전혀 없다. 그저 책을 통해서 이론적인 교육을 스치듯 받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도 생명의 존귀함을 스스로 느끼고 깨달을 기회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시대가 안고 있는 생태계 위기도 결국은 생명의 문제이고,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타생명에게까지 확산시킬 수 있다면 우리가 풀어야 할 절대절명의 과제인 환경위기도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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