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2년 기자협회보가 이른바 「YS 장학생 리스트」를 폭로하면서 기자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직후 나는 당시 이근성 기협회장의 권유로 기협 「자율정화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됐다. 그날 귀가해서 집사람과 저녁을 하면서 『자정위원장을 맡게 됐다』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재정위원장이 아니고 자정위원장?』 그보다 몇 주 이전 기협회보에 『나도 촌지를 받았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쓰면서 이제부터라도 금품수수나 권력에 빌붙기 등 구태(舊態)와의 단절운동에 함께 나서자고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협회보가 나오던 날 한 선배가 내게 오더니 비아냥댔다. 『너 하나의 고해성사로 세상 물이 맑아질 것 같으냐?』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남들처럼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다는 충고였다.
요즘 시민단체들의 언론개혁 요구에 접하면서 그 선배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지나온 우리의 언론사(言論史)와 20여년의 기자생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선배의 말은 앞으로 최소한 10여년은 유효할 것이다.
내가 「위원장」으로 있던 자정위원회는 그 뒤 「위원」을 확보하지 못해 회의 한번 제대로 열어보지 못하고 해산했다. 그것이 우리 언론계의 현실이었고 그런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윤리문제에 대한 언론계 내부의 격렬한 자성과 함께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혁신이 뒤따라야 하는 까닭이다.
지난 3월말 도쿄에서 열린 일본편집인협회 주최 국제세미나에 가 보니 아시아 각국의 언론인들도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세미나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문제점으로는 언론인들의 전문화 교육 부재, 정부의 직,간접적인 언론자유 통제기도 등이 있었다.
특히 정보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따르는 사회 각 분야의 변화를 언론이 효과적으로 보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됐다. 일본신문협회는 신문·방송기자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한가지 방안으로 언론인 재교육센터의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다.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6개국에서 온 세미나 참석자들은 한국정부와 조선, 중앙, 동아 등 이른바 「빅3」언론사간의 대립양상에 커다란 관심을 표명했다. 정부가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세무조사와 언론고시 등을 실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나타냈다.
나는 정부의 세무조사 실시배경과 시민단체의 언론개혁 요구 등을 설명하면서 한국정부와 「빅3」의 주장을 똑 같은 비중으로 전달했다. 양 측 주장에 두 일리가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언론개혁의 시급성과 당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부도 나름대로는 그 같은 시대적 요구를 배경으로 언론계의 해묵은 관행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은 언론시장에서의 공정한 룰(Rule)을 만들어주는데 그쳐야 한다. 혹시라도 정부가 일부 언론기관의 비리나 부정을 핑계 삼아 전체 언론을 길들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는 커다란 오산(誤算)이라는 점을 서구의 언론사는 증언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언론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계기가 된 제이 니어와 미네소타주간의 소송 (Near v.Minnesota, 결심공판 1930년)에서 찰스 에반스 E. 휴즈 대법관이 내린 정의를 되새겨야 한다.
『매사에 적절한 이용과 오,남용을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언론에 들어맞는 말이다. 그래서 몇가지 해로운 가지를 잘라버림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의 활력에 손상을 입히기 보다는 푸짐한 나뭇가지에 그들을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고 각 주(州)는 결정하게 된 것이다』이 판결은 일부 주간지들의 선정주의적 폭로기사가 난무하던 1920년대 미네소타주에서 「토요 프레스(Saturday Press)」라는 시사잡지를 발행하던 제이 니어를 언론계에서 영구히 추방할 목적으로 미네소타주 검찰이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 대해 내린 원고패소 판결의 일부다.
이 판결은 권력에 의한 언론의 사전규제(prior restraint)를 금지한 최초의 것으로, 월남전 당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을 상대로 한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소송의 선례가 됐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 언론계는 이번 세무조사를 거울삼아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여론 선도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언론을 요리해보려는 어떤 움직임에 대해서도 경계의 눈길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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