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일, 신문사로 장문의 팩스가 날아들었다.
「호소문」이라고 제목을 붙인게 별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흔히 있는 그런 사연이러니 했다.
하지만 A4 용지 6쪽에 걸쳐 빼곡이, 그것도 자필로 적어내려간 것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B형 간염에 대한 무지와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천형」(天刑)의 삶을 살고 있다』는 김모씨(57·부산시 금정구)의 사연은 대충 이러했다.
초년과 중년을 어렵게 살며 자수성가한 김씨는 지난 90년대 중반, 울산 H사의 외주업체를 운영하게 됐다. 그는 95년 1월 신체검사에서 B형 간염 보균자라는 진단을 받았다. H사는 전염병예방법상의 「간염 업무종사자 취업제한」규정을 빌미로 그에게 공장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은 그는 거리로 내몰렸다.
『보균자라도 전염성이 있다』는 것이 회사의 주장. 이후 김씨는 다른 회사에 원서를 내봤으나 번번이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고, 결국 지난해 10월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했다.
아버지와 같이 간염 보유자 판정을 받은 그의 아들(29)도 99년 보건대학을 나와 각종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지만 취업을 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 생활을 전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무지가 초래한 현실
김씨는 정부가 지난해 10월 5일 전염병예방법 상의 「B형 간염 업무 종사자에 대한 취업제한 규정」을 시행규칙에서 삭제하자 탄원서를 내고 『이러한 모든 과정이 전염병 예방법 제30조 1항 및 벌칙규정과 동법 시행규칙 제17조의 「강제권」에 의해 초래된 「억울한」현실』이라고 항변했다.
흔히 B형 간염 보균자로 통하는 사람들은 지난해 이 법의 개정 이전까지 실제 간염의 발병 유무와 상관없이 제3종 전염병 환자로 취급받았다. B형 간염의 심각성이 대두되던 80년대, 정부는 『술잔을 돌리고 음식을 함께 먹는 잘못된 식습관이 B형 간염 천국을 만든다』며 식생활 및 음주문화 개선을 위한 캠페인까지 벌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이는 사회적 통념으로 굳어졌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청결치 못한 사람으로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국립보건원은 지난해 10월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전면 부정했다. 『B형 간염은 수직(모자)감염, 오염된 혈액에 의한 감염, 성접촉 등을 통한 전파 등이 가능하며 일상적인 공동생활(타액-피부접촉-호흡기 감염)을 통해서는 감염되지 않으므로 동 질환의 관리방법을 격리 등의 조치에서 제외한다』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잘못된 것은 음식문화가 아니라 정부의 간염 전염 경로에 대한 '무지'였음이 판명난 것이다.
사회적 편견이 문제
문제는 김씨와 같은 피해를 당한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국립보건원이 추정하는 국내 간염 보균자는 전국민의 5~8%. 어림잡아 30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간염으로의 발병률이 일반인 보다 조금 높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것이 없다.
더 큰 문제는 법은 개정됐지만 굳어진 사회적 통념에 의한 차별은 여전하다는데 있다. B형 간염을 또 하나의 천형으로 만드는 속박은 이제 「법」이 아니라 「간염은 무조건 전염된다」는 사회적 편견이라는 말이다.
김씨는 정부가 「잘못된 강제권」임을 인정하면서도 삶과 가정이 송두리째 망가져버린 자신의 피해는 단순한 「불편」「불이익」정도로 인식하는데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정부와 관련기관에선 법 재개정을 통해 취업차별에 대한 처벌조항을 신설하고 기존의 사회적 통념을 깨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김씨와 같은 피해자들에겐 분명한 정황증거가 있을시, 이제라도 정부가 나서서 「인간다운 삶」을 되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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