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큰 것이면 좋은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나라가 오랫동안 대국(大國)의 지배를 받은 데서부터 생겨난 콤플렉스의 발로인지 모르겠다.
대도시에서 대규모 주택단지의 대형 아파트에 살며, 큰 자동차를 장만하여 큰소리치며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다. 학교도 클수록 좋다고 여긴다. 중·고등학교 한 학년이 15개 학급이 되는 학교가 있을 정도이고, 대학도 본래의 설립목적이나 창학정신과는 상관없이 모두 대형화되고 있다. 강의실도 대형화되어 확성기 없이는 강의를 들을 수 없고, 그 많은 학생들을 교수들은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 상점, 서점, 병원, 약국도 대형화되고 있다. 심지어 음식점도 교회까지도 대형화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밥상도 크고 음식 가지 수도 많을수록 좋고, 냉장고도 커야하고, 텔레비젼도 크고, 옷장도 커야하고, 방도 커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거리의 간판도 크기로 경쟁하고 글씨가 하도 커서 가까이서는 읽을 수가 없을 정도다. 온갖 집회도 클수록 좋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사람의 눈도 크고, 코도 크고, 또 다른 부위도 커야만 할 것으로 여기고, 무서운 후유증을 감수하면서까지 성형수술을 통해 크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배짱도 크고 목소리도 커야 하며, 선물도 커야하고, 온통 다 커야한다고들 생각하니 이젠 각종 사고도 커질 수밖에 없다.
『속 빈 강정이 크기만 하더라』는 속담처럼, 큰 것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의 위기는 도시의 거대화와 건물의 대형화와도 관계가 깊다고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대형화는 인간에게 획일적이고 기능주의적인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계화와 관료제가 도입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인간은 기계화되고 종래에는 소외되고 인간성은 상실되고 만다.
이제 큰 것이면 무조건 좋다는 생각을 버릴 때가 되었다. 작은 것도 고우며 좋을 수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사람다운 삶과 크기(量)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키가 크든 작든, 입이 크든 작든, 도대체 신체의 어떤 부분이 크든 작든지 간에 신체의 양적인 것은 사람다운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 큰 집, 큰 방, 큰 냉장고, 큰 자동차가 나에게 필요한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묻고 반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일에 대해서 묻고 반성할 줄 모른다면, 그는 이미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되고 만다. 식구는 적은데 냉장고가 크면 비용만 많이 드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고, 나중에는 귀중한 음식을 버리게 된다.
오늘날에도 서양에서조차 명문 중·고등학교는 작다. 학급수도 적고, 한 학급당 학생수도 적다. 아무튼 학교 크기가 좋은 학교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학교는 작아도 얼마든지 좋은 학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감이나 교장이 모든 교사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교사가 적어도 한 학년 학생 전부의 신상과 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인격적인 교류가 용이하고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아져서 소외되는 학생도 없어지고 교육이 잘될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또 교회가 작아야 성직자와 신도들간에 친교와 대화가 용이하고 신자 상호간에도 형제자매의 사랑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시지탄이지만 주교좌 성당 외에는 이제부터 지을 우리 교회는 가능한 한 작아야 할 것이다. 『예수 작은 자매회』, 『예수 작은 형제회』라든가 「소비(小卑)」라는 형용사가 붙는 수도회의 명칭은 있어도 「대」나 「큰」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수도회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님도, 리지외의 성녀 소화데레자님도 유난히 「작은 꽃」을 좋아하셨고, 찬미해마지 않으셨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우리가 큰 것을 좋아하는 욕심으로부터, 낭비벽에서 생겨난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재화를 아끼고 가능한 적게 소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지금 참으로 중요한 것은 작은 것을 가지고 만족해 살면서 감수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대한발을 겪고 있다. 이 기회에 우리는 물부터 아껴 쓰는 훈련을 하기로 하자. 우리는 그 동안 빚더미 위에서 물쓰듯이 흥청망청 낭비하고 살아왔다. 그 물이 지금 부족하다. 한국인은 유럽인보다 3배 내지 5배 이상 더 많은 물을 사용해 왔다. 우리는 작은 것이 주는 묘미(妙味)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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