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믿는가. 생명의 하느님인가, 죽음의 하느님인가.
어정쩡하게, 생명을 옹호하면서 죽음을 정당화하거나 외면하는 하느님을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 절대로. 새만금 갯벌 간척 사업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묻고 도전하는 것의 핵심이 바로 여기 있다.
새만금 간척 사업을 옹호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창세기 1, 28절을 줄곧 인용하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더러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하신 세상에 인간만 있지 않았음은 외면한다. 하느님께선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공과 바다와 육지를 만드시고 그 곳들을 다른 피조물들로 또한 가득 채우셨다.
하느님이 무척 기뻐하신 것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한데 어우러진 조화와 평화, 생명의 세상을 보셨기 때문이다. 인간만 달랑 팍팍하게 서 있는 땅을 보시고 그분이 과연 "참으로 아름답구나!"하셨겠는가. 당신이라면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가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인간이었으니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야 했기에, 자연에 의지하고 자연의 도움을 구하는 식으로 자연에 대한 다스림이 어느 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성, 존중감은 남아있어야 했다.
인간에게 부여된 것은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한 보전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과 공존의 무게를 넘어서 배타적이고 파괴적으로, 탐욕스럽게 진행될 때 조화와 평화는 깨진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묵상해보자.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몹시 아프셨다. 그래서 「내가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하고 탄식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구원의 배, 노아의 방주에 누가 올라탔는가.
노아만이 아니다. 인간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다른 피조물들이 함께 타서 살아남는다. 노아에게 부여된 또 다른 임무는 그들을 먹이고 살리는 것이다. 각종 동물의 씨가 마르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공존과 생명 살리기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소명이다(창세 6).
여의도 면적 140배 규모의 광대한 갯벌을 메우는 새만금 간척 사업. 그것은 인간이 바다에 짓는 바벨탑이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인간의 오만한 도전이다. 우리가 최근에서야 그 소중함과 가치에 눈뜨기 시작한 갯벌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고 느끼고 찬미하고 감사드려야 할 하느님의 신비가 무한함을 일깨워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갯벌은 하느님의 몸이요 하느님의 신비가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바다의 자궁, 바다의 고향 새만금 갯벌에는 무수한 생명들이 꿈틀대고 있다. 이 갯벌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풍요로운 터전이다. 세계적인 보호철새 도요새들의 중간휴식처가 이곳이다.
무수한 어민들이 거기 의지하며 생존하고 희망을 잃지 않아 왔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이것을 모두 죽인다. 갯벌의 생명들뿐 아니라, 또한 갯벌을 메우기 위해 수십 개의 산과 바다모래가, 섬들이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
대체 누가 감히 무슨 권리로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참히 죽일 권리가 있을까. 누가 감히 하느님을 앞장세워 그같은 떼죽음을 정당화하는가. 살아있는 멀쩡한 것들을 다 없애면서, '종(種)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어찌 거기다 '친환경적'이라는 말을 그리 쉽게 쓸 수 있을까.
무지와 후안무치의 극치다. 자연은 또한 미래 세대의 것이다. 그들이 배우고 느끼고 감동해야 할 그들의 재산을 어떻게 잠시 머물다 가는 현 세대의 이기심으로 가로챌 수 있을까.
정부는 시화호 담수화 계획에 8000억 원을 쏟아 붓고도 항복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 지역 해변가에 즐비하게 밀려오는 죽음의 행렬들. 간척사업으로 떼죽음을 당한 조개류들이 이제 하얗게 해안으로 밀려와 거대하게 쌓이고 있다. 대학에서 퇴적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시화호 유역의 바다 속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그 속에서 물안경을 쓴 채로 울고 말았다 한다.
바다 생명들의 엄청난 죽음 앞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새만금 사업도 결국 시화호의 재판이 될 것이다.
강행론자들은 끝없는 낙관과 환상적인 포장으로 진실을 가리려하지만, 시화호와 새만금에서 죽어간, 죽어가고 있는 생명들이 자신들의 희생으로 그 위선과 죄악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며 증거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새만금 사업 강행이라는 현상적인 결과 앞에 이제 다 끝났노라 손털며 뒤로 물러설 수가 없다. 우리의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하느님의 몸, 하느님의 신비 새만금 갯벌을 살리라는 분명한 부르심이 있기에.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끊임없이 호소해오는 저 생명들의 아우성이 있기에. 약하고 소외된 것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 새만금 갯벌에 계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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