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다가오는 인간 실존의 한 부분이다. 노년에 맞는 죽음이나 불치병이라는 급작스런 질병의 선고에 따라오는 죽음 등 우리들 인간 실존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이 있지만 그러한 죽음들에 있어서 공통된 것 하나는 죽음을 맞게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반응이 일단은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실상 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가능성을 마지막 순간에 한꺼번에 소진한다는 의미이며, 때로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처해 있는 사람을 실재 세계에서 완전하게 결별시키는 악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세상을 하직하고, 가족 친지들과 영별한다는 것, 또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왔던 모든 업적이나 인간 관계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상실의 공포를 안겨주는 것이 죽음이라고 여겨지면서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너무나 허무하게 만들기도 한다.
죽음은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 또한 극심하다. 진통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잠시도 안정될 수 없는 말기환자나 불치병으로 근근히 생명만을 유지하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환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부정적 체험은 환자들 자신에게 그 모든 고통은 하루라도 빨리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극심한 고통이 현대인들의 의식에 가져다준 것이 곧 안락사의 사고방식이다.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 고통이 인간적인 비애와 소외를 가져오고 결국 이를 벗어나기 위한 최상의 방편은 안락사뿐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안락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품위있는 죽음」이 그 으뜸을 차지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의 고통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건 육체적인 것이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도 당당하게 죽을 수 있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위로부터 의료적인 도움을 받아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방법의 죽음이 「품위있는 죽음」일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품위있는 죽음」이란 결코 안락사 형태의 죽음이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건 앞에서 그것이 비록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있는 자유와 의식을 가지고 생명 전체를 요약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난달에 대한의사협회가 확정한 의사윤리지침에서는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명기하고 있는데(57조2항) 이는 생명을 보호하고 살려야하는 의사가 안락사 시술자, 자살방조자 혹은 촉탁살인자까지도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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