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최승룡 신부님(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 담당)이 3장의 사진을 보여주셨다. 그 사진에는 한국화로 성화 「성모자와 어린 요한」, 「성 김대건 신부와 성 남종삼, 성 류대철」, 「성 강완숙과 성 김효주, 성 김효임」이 그려져 있었다.
최신부님은 교회사의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 로마에 갔다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의 한쪽 벽에 걸려있던 한복 입은 성인들 그림을 보고 사진으로 찍어 오셨다. 최신부님은 그 작품들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인 올해 우리나라에 가지고 와서 전시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이 그림에 적힌 글을 통하여 작가가 월전 장우성 화백(1912~)화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월전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인화가로서 전통적인 동양화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표현함으로써 동양화의 장을 넓힌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며칠 후에 월전 미술관에 가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월전은 9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박물관 일을 직접 챙기고 작품활동을 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다. 월전은 세점의 성화 뿐 아니라 당시에 많이 그렸던 다수의 성화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재미있게 들려 주셨다.
해방 이후, 월전은 장발 화백과 함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장화백은 신자도 아닌 월전에게 가끔씩 성화를 그리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셨던 노기남 대주교님은 교황을 방문할 때 월전의 성화들을 선물로 가져가곤 하셨다. 그러던 중 1950년에 로마에서는 성모성년을 기념하여 「전교지역 성화 전시회」를 열었는데 월전은 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서 1949년에 성화 3연작을 그렸다. 그것이 바로 사진에 나오는 성화 3연작이었다. 그 이후 월전은 자신의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몇 년 전에 로마를 방문했던 월전은 이 성화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싶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했지만 찾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사진을 통해서 성화들을 본 월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참으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머지 않아 이 작품들을 우리나라에 들여와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월전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지난 8월 1일 여름 장마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가운데 월전과 가족들, 최신부님과 나는 혜화동 주교관에서 바티칸으로부터 온 그림 상자들을 뜯었다. 그 날 월전은 자신이 그린 성화 3점을 52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월전은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 며칠 동안 마음으로부터 준비를 하신 탓인지 놀라울 만큼 평온한 모습이셨다. 나머지 그림들을 다 개봉하여 한 쪽 벽에 기대고 난 후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나는 선생님께 『헤어졌던 가족을 다시 만난 것 같지 않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월전은 『가족이 아니라 그리운 애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지금 절두산 순교 박물관에서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신앙의 향기 200」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곳에는 최 신부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가져온 황사영 백서의 원본과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진귀한 유품, 월전의 성화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10월 15일까지 이어진다. 이 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황사영의 백서와 월전의 성화들은 아쉽게도 우리나라를 떠나 다시 바티칸으로 보내진다. 아마 우리들 생전에 다시 황사영 백서나 이 성화를 볼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이번의 뜻깊은 전시회를 관람하여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우리 교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교회 예술품들에 대한 정리와 보존, 보수와 활용 방안 등도 활발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우리 교회의 소중한 문화 유물들을 영구히 보존하고 학습할 수 있는 교회 박물관의 건립을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꿈을 꾸고 정성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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