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이 투명하던 어느 토요일, 나는 결혼식장에 있었다. 중심에서 조금 먼 그곳에는 한 쌍의 결혼 풍경으로 인해 흥분의 열기가 가득했다. 나도 거기에 있었다.
1992년 처음으로 대학 교수가 되면서 나는 ‘제자’라는 말을 처음으로 가슴에 새기게 됐다. 그 시절, 내 인생 자체는 서울에서 등 떠밀려 나온 패배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늦은 박사학위를 받아 쥐고 서울의 모 대학을 노크했지만 냉혹하게 거절당했고, 경기도의 어느 대학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도 그 질긴 패배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대학의 국문과는 야간이었다. 해가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먼 산을 넘어 갈 때 즈음, 우리는 지하 101호 강의실에 모이곤 했다. 어둠이 창밖에 두껍게 내리는 야간 강의에서는 공부보다 ‘울컥’하는 감정적인 이야기가 제격이다. 나는 나를 낮추었고, 가능한 한 학생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우리는 가까워졌다.
당시 국문과의 반장은 나이가 좀 든 학생인 용근이었다. 나이 탓인지 그는 인간성도 따스했고, 제법 리더로서의 자질도 갖췄다. 우리 반은 때때로 촛불을 켜 놓고 ‘문학의 밤’을 즐기기도 했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 반에는 커플이 두 쌍이나 탄생했고, 덕분에 나는 두 번이나 주례를 서야 했다.
그런데 그 반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용근이만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기운 없는 목소리로 회사를 그만 뒀다는 소식과, 친구들을 뜸하게 만난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리고 몇 년 후. 용근이는 다시 직장을 얻었고, 몸도 건강해졌다는 기쁜 소식을 들려줬다. 그러나 나는 “결혼은?”이라고 차마 묻지 못했다. 어쩌면 용근이는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씩씩한 목소리로 결혼한다는 소식이 날아 왔다. 나는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며 축하를 건넸다. 그의 나이 마흔 둘이었다. 나는 마흔 둘의 신랑을 보기 위해 결혼식장을 찾았다. 진정으로 그를 축복하고 싶었다. 그를 축복하는 내 마음의 가장자리에는 내가 패배감을 가졌던 그 시절의 아픔이 배어 있기도 한 것이다.
신부는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의 딸인지, 마음씨는 어떤지 등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용근이가 결혼한다는 사실 자체로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 신부는 깊고 넉넉해 보였다. 용근이의 결점까지도 전부 안아줄 여자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 곳에서 그의 친구들이자, 나의 제자들을 만났다. 모두 결혼을 했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내 제자들의 아이들에게 만 원짜리 한 장씩을 쥐어줬다. 너무 행복했다. 열심히 돈을 벌어 이렇게 제자들의 아이들에게 조금의 용돈이라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바보처럼 뿌듯했다. 나는 정말 성공한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그날 비로소 ‘진정한 스승’이 됐다고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스승이 될 수 있겠냐며 반문하곤 했다. 나는 습관처럼 학교에 갔고, 교실에서 시를 가르쳤다. 그것은 늘 내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이상은 내게 없었다. 교실에서도 돈 계산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아가기 위해 교실에 들어갔고, 그것을 밥줄처럼 느꼈었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대책 없는 이기주의자인지를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늘 세상에 대한 분노만 가득했다. ‘세상이여,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하느냐. 내가 지금 아파도 말하지 않느냐.’ 그렇게 나 자신을 위해서만 외치고 살았다. 반성한다.
‘밥’을 먹기 위해 교수로 살았지만, 스승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교수는 되도, 스승은 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육십이 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제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아이들을 안아주며 진정으로 축복을 빌었다.
‘하느님, 제발 이 제자들과 아이들이 제몫을 발휘하며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힘도 알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주인공 용근이 부부가 세상의 약점을 사랑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주소서…’
봄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손잡고 외치고 싶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4월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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