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중독치료와 관련한 많은 병원과 기관이 있다.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다. 그런데 중독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이런 병원과 기관을 잘 찾으려 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병이 낫지 않는다. 중독치료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중독치료는 기회(Chance)가 중요하다. 중독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할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앞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더욱이 뒷면은 전혀 볼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살아간다.
중독자가 되면 자신의 생각, 행동, 감정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중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알코올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중독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알코올 중독자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가족, 친구, 직장상사, 성직자들이 중독자에게 중독 사실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1998년 2월 평소 아버님처럼 모시고 따르던 김옥균 주교님께서 나를 조용히 주교관으로 부르셨다. 술을 마시며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나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거의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 주임신부는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다. 아침미사도 제대로 봉헌하지 못했고, 기도모임이나 봉성체도 빼먹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주교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다. 주교님과 나 사이에 30분 이상 침묵만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교님은 한참만에야 입을 떼셨다. “허 신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술로써 끝낼 수 있는가?”
주교님의 짧고 강력한 말씀은 중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나를 ‘술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직면시켜 주었다. 내가 치료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둘째, 다른 핑계나 스스로를 합리화를 할 수 없는 기회(술로 인해 일어난 위기상황 등)를 이용하여 강력하게 치료를 권하는 것이다. 그동안 별 문제없이 지내오던 가정에서 남편이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와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아내는 “만약 당신이 술을 끊지 않는다면 당신과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위기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중독자는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천사처럼 행동하지만, 가정에서는 폭군이나 악마처럼 행동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다. 이런 만큼 가족들이 중독자에게 잔소리만 하고, 무조건 기다리며 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셋째, 중독자가 다음 날 술이 깨어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중독자의 언행에 대해서 알려주고, 가족들이 가졌던 감정과 생각을 솔직히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치료의 필요성에 대해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미안하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중독자의 사과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는 중독자를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50대 초반의 남성과 상담한 일이 있다. 그는 지금까지 아내에게 술을 끊겠다는 각서를 100장 넘게 써 주었다고 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각서는 무용지물이다.
넷째, 자녀들이 중독자에게 치료를 권하는 것도 효과적일 수 있다. 한 아들이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어머니와 싸우면서 칼을 휘두르는 험악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 아들은 다음 날 아버지에게 알코올사목센터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을 것을 권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권유가 계기가 되어 현재 열심히 단주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그 가정이 행복해진 것은 당연하다.
중독을 벗어난 삶은 새로운 세상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면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실 것이다. 지난 부활대축일에 회복 중인 K와 B 중독자와 함께 봄꽃 구경을 갔다. 나는 꽃을 매만지며 그들에게 “이제 술을 끊으니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을 수 있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 역시 “술 냄새보다도 꽃냄새가 더욱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중독자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권하고 싶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그곳에 행복이 있다. 지나간 과거는 묻고, 이제 새 일을 시작해야 한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야 4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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