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런 겨울이 끝나는 가지에 산수유가 여리게 꽃을 피우고, 뒤이어 개나리 진달래가 굿판을 치며 지나가더니, 어느 순간 사방에 벚꽃이 피고 지며 우리들을 기분 좋은 열락의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다.
꿈결 같다고 말했다. 연분홍 꽃비를 맞으며 다시 살이 짓이겨지는 앳된 젊은 사랑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꽃들은 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한동안 우리를 정신없이 대문을 열고 집밖으로 나돌게 했다. 이젠 끝났나 하고 창을 열었는데 귀부인 같은 목련이, 이팝나무의 쌀 같은 꽃잎이 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놓고 신부의 하얀 드레스 같은 꽃의 흰빛에 취해있었다. 날 어쩌라고….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콩을 갈고, 커피를 내리는 전 과정을 그 창밖의 흰 꽃과 함께했다. 그리고 영혼이 투명하게 열릴 것 같은 커피 향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내가 살아있는 존재의 행복을 눈물겹게 받아들였다. 어디선가는 모란도 피어 날 것이다. 김영랑 시인이 없어도 봄은 왔고, 모란도 쩍 벌어지며 피지 않았는가. 그 우아한 모습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땅이 제아무리 고통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뭔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창밖에는 목련도 이팝나무 꽃도 사라졌다. 그러나 남쪽 창가에는 보란 듯 라일락이 만개해 있다. 철쭉이 어느덧 땅을 메웠고, 샤넬 No.5 향보다 진하고 매혹적인 라일락 향이 나를 정지시킨다. 무슨 ‘봄 죄’라도 짓고 싶은 유혹이 오래도록 내 안에서 넘실거린다.
봄은 겨울의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죽은 듯 묵묵한 나무들 속에서 저런 아름다운 꽃들이, 그것도 향을 뿌리며 이 지상에 나타난단 말인가. 살아있는 자가 누리는 이 엄청난 감사를 봄에는 누구나가 한 아름 선물 받게 된다.
어느 순간 꽃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아파트 정원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애교를 부리기는 하지만, 이제는 잎들의 세상이 온 것이다. 신록이라 했던가. 나무의 잎사귀가 새의 혀처럼 아주 작게 나오는 것을 우리는 ‘눈엽’이라고 부른다.
‘눈엽’을 거쳐 ‘신록’이 되고, 그 다음에 만나는 눈부시게 억센 7~8월의 잎들을 우리는 ‘녹음’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곧 그들은 ‘단풍’을 무겁게 지고, ‘낙엽’이라는 이름으로 땅위에 떨어진다.
잎의 일생은 한 인간의 일생만큼이나 무겁고 치열하다. 푸른 잎사귀가 온통 붉게 물들어서 땅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라. 잎들도 사랑을 하다가 울고, 가슴 터지고, 기다리고, 그리워서 온 몸이 멍드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신록은 저렇게도 예쁜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아름다운 색의 신록을 나무에 달 수 있었을까. 아무리 우울해도 저 신록을 보고 있자면 정말 좋아했던 남자의 손이 내 등에 닿는 전율 같은 것이 온다. 그렇다. 저 신록을 보면 날 잔인하게 버린 남자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미 꽃들을 잊어버렸다. 앞으로 몇 달간은 저 젊디젊은 잎과 함께 살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행복을 즐기지만, 그들에게는 앞으로 억센 삶만이 남았다. 신록의 이름으로 사랑받는 것으로써, 이미 그들이 누릴 여린 사랑의 드라마는 끝났다. 이제 폭우가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뙤약볕이 그들의 몸을 지질 것이다. 천둥이 그들의 꿈을 박살낼 것이다. 폭풍이 그들의 몸을 꺾어 놓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에게 무서운 세월이 남아 있다. 우리가 깊은 바다 같은 녹음이라고, 그 초록의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다면 여름의 녹음을 찬양할 때, 그들은 이미 그때부터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겨울나기만 힘들겠는가. 저 어린 신록들이 녹음으로 짙푸르면서 겪어야 하는 시련과 고통은 실로 상상으로도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 속으로 결실이 익는다.
신록의 신부는 며칠 남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숙인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 앞에 경건하게 절하고 싶다. 그들에게 닥칠 험난한 세월 안으로 붉은 열매가 무르익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때를 가을이라고 부른다.
마음껏 봄을 누리자.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연둣빛 살결의 잎과 함께 희망을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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