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을 고릅니다. 집 앞에 빌린 다섯 평짜리 작은 텃밭입니다. 쇠스랑을 가져다 밭 구석구석을 일굽니다. 큰 돌은 일궈내고 뭉쳐진 흙은 잘게 부숩니다. 밭에서 나온 돌은 한데 모아 밭 옆에 모아놓고, 부순 흙은 잘 펴서 밭을 고르고 나면 아기 속살같이 부드러운 땅의 속살이 드러납니다. 그 속살 위에 상추와 적 상추 모종을 심고 쑥갓과 케일, 신선초와 얼갈이배추 씨앗들을 넉넉히 흩뿌려줍니다. 농부들이 씨앗을 뿌릴 때 땅속의 벌레와 새와 짐승을 위해 넉넉히 뿌렸다는 그 마음을 흉내 냅니다.
이제 밭 한 켠에 이랑을 만듭니다. 고랑 사이 흙을 잘 돋아 적당히 높고 두둑하게 만들어줍니다. 여기에 얼마 전 아는 농부형님께 얻어온 씨감자를 잘라 깊숙이 심어줍니다. 이 녀석들은 올 여름 장마가 오기 전에 튼실한 감자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내는 텃밭농사 첫 해 때 땅속에서 줄줄이 달려 나오는 뽀얀 감자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감자 수확은 아내 몫입니다. 어느 듯 작은 텃밭의 모양새가 납니다. 올해 텃밭 농사의 시작입니다.
이제 아이들 차례입니다. 아이들은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받아와 막 자리 잡은 모종과 씨앗들에게 듬뿍 듬뿍 물을 뿌려줍니다. 사람과 땅과 물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한참을 밭 고르고 모종 심고 씨앗 뿌리고 이랑을 만들며 땀 흘리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문득 멀리 경남 황매산 골짜기에서 농사짓고 있는 농부 시인 정홍 형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어느 새 저녁녘 해지는 칠보산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밭두렁에 앉아 천천히 외워봅니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정홍 시인이 쓴 ‘내가 가장 착해질 때’라는 짧은 시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밭을 고르고 이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린 다음 지금 내 마음 같습니다. 땅과 함께 나도 착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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