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본격적으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성당 주임신부님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교구 소속의 허보강(Wolfgang Haupt)신부님이었다. 그분이 어린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분의 깊은 신심과 성실한 삶, 안장이 높은 자전거를 타고 멀리 흩어져 있던 공소들을 오가며 교우들과 아이들을 가르치고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시던 모습 등은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서 신부님은 많은 것을 나누어 주셨다. 필자가 고등학생이 되자 신부님은 나누어주는 심부름을 종종 필자에게 시키시곤 하셨다. 그러한 체험을 하면서 신부님은 영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범적인 삶으로,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나누어주는 분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삶은 참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갖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의 흐름 속에 부제품을 받은 다음날 교구 사목국장 신부님이 오셔서 “주교님께서 비엔나로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하셨으니 준비해라.”고 했다. ‘비엔나라면 허보강 신부님이 한국에서 선교생활 20년을 하신 후 귀국하시어 본당신부로 일하시는 곳이 아닌가? 그곳으로 공부를 하러간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만은 없다.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일이 아니고서는 이럴 수 없다.’ 기쁜 마음으로 그곳으로 가서 공부를 하면서 차츰 알게 된 것이 있다. 당시 허신부님께서 그렇게 많이 나누어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평신도들이 허 신부님을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필자를 교구에선 얼마동안 보좌신부로 일하게 한 다음 지금 근무하고 있는 대학이 있는 지역을 관할하는 하양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일하게 했다. 그 옛날 필자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셨던 허 신부님이 하신대로 많은 것을 나누어 주고 싶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절제하면서 살아야 했는데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필자의 당시 의욕은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대단했었다. 일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본당의 일상적인 일, 대학 강의, 저술 작업, 이웃한 군부대와의 협력, 낡은 공소 허물고 다시 짓기, 학교 교수신부님들 숙소 신축, 환경운동, 음악회, 본당 60주년 기념회 등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늘 무엇인가를 했다.
하고 있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훨씬 더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은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고해성사를 좀 더 천천히 성실하게 주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았고, 레지오를 비롯한 제 단체를 자주 방문하여 잘 지도하고 싶은데, 병자들을 방문하는 날에는 그들과 오래 대화하고 많은 것을 주고 싶은데, 강론 준비를 잘 하고 싶은데, 신자들에게 돈 얘기는 아예 하고 싶지 않은데, 기도생활과 공부를 좀 더 성실하게 하여 신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좀 더 청빈하게 살고 싶은데 … 안 되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좀 더 노력하면 혼자서라도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했지만, 신자들에게 돈 얘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이 나누어주는 일, 신자들이 찾아오거나 손님들이 오면 넉넉하게 대접하는 일은 혼자서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당은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받아야 누군가에게 건네줄 수 있는 취약한(?) 여건에 놓여 있다.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내놓게 하는 일도 그것을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날마다 강론하는 일, 단체들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좋은 말을 해야 하는 일, 조금 전에 좋은 말을 했는데 돌아서면 좋은 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또 만나야만 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하여 이미 많이 알고 있다. 이들을 상대로 리더의 역할을 계속 하는 것이 때로는 힘에 겨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똑같은 물리·화학·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한 것으로 적극 협조하는 평신도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 옛날 그 먼 곳에서 허보강 신부님을 후원했던 평신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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