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변호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아침 출근길의 복잡한 지하철에서였다. 신당역쯤에서 단정한 차림의 한 노인이 난간을 잡은 채 차창 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자리를 양보하게 됐고, 곧이어 옆자리에 앉게 되어 “어디 외출하시나 봐요?”라고 여쭙자 “나, 출근해요”라는 노인의 답변에 나는 순간 “출근하신다고요?”라며 조금은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렇게 되물은 까닭은 노인의 연세로 볼 때에 바로 그 ‘출근’이라는 말이 낯설게 들렸기 때문이다. 의아해하는 눈빛을 알아차린 노인은 “나, 전직 법관으로 지금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에 날마다 나갑니다. 영어성경을 읽고 있는 걸 보니 외국에서 오셨나?”
그렇게 해서 연락처를 받게 된 나는 최근에 출간한 시집을 보내드렸고, 그것이 계기가 돼 K변호사의 사무실을 방문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개인적이고 국내적인 일에서부터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일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됐다.
산수(傘壽)를 넘긴 연세에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의 K변호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문학을 하는 나로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한국 현대사의 질곡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곤 한다. 사도 바오로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있던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연로하신 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K변호사가 격동의 시대를 올곧게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역사적 현장의 생생한 증언에 해당한다.
이처럼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히브리서 11,3)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매스컴마다 연일 보도하고 있는 ‘박연차 리스트’를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그러한 심정은 퇴임연설에서 “권력자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민주주의는 시작합니다”라고 강조했던 에드워드 히드 전 영국수상의 모습과 무주택자를 위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 ‘해비타트’에서 자원 봉사함으로써 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려 주기도 하고, 우리는 왜 우리가 뽑은 지도자를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연례행사처럼 소환하고 조사하여 ‘연옥’에 감금하는 정치문화를 지속해야만 하며, 우리에게는 왜 시작과 끝이 한결같은 그런 지도자가 없는가라는 물음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질책하는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의 「차마설(借馬說)」의 구절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박승봉이 「월남 이상재 행장」에서 평한 “민족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죽고 사는 일에 관계없이 싫어하거나 괴로워하여 회피하는 태도가 없었다. 중년 이후로 더욱 곤액해서 서울에 있은 지 수십 년 동안에 집 두어 칸을 얻지 못하고 동서로 옮겨 다니면서 늙을 때까지 일정한 곳이 없었으나 그래도 태연했다”라는 구절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이 시대에 ‘출근’한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이고 축복이자 우리 모두의 삶을 활기차게 하는 원동력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님(유스티노)께서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옛말을 명심하면서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교수생활을 해야 한다”고 이르시던 말씀과 “첫 출근하던 때의 바로 그 마음으로 매일 아침 출근한다”는 K변호사의 말씀이 겹쳐지기도 한다. 맹자가 강조했던 “측은지심 인지단야 수오지심 의지단야 사양지심 예지단야 시비지심 지지단야(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謝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즉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어짊의 실마리라 하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의로움의 실마리라 하며, 감사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예의 실마리라 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지혜의 실마리라 한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서기도 하는 요즈음, 정치적 핫이슈로 떠오른 바로 그 리스트의 ‘보이는 것’의 이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그것이 무엇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