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몇 살이나 아래지만 친구같이 지내는 후배 하나가 있다. 그는 얼굴에 ‘모범’자가 붙어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이다. 얼굴은 얌전해 보이고, 약간 통통하게 살이 올라 복도 있어 보인다. 고전적이며 전통스러운 멋도 지녀 어른들이 흔히 ‘맏며느리’같다고 느끼는 그런 스타일이다.
팔자도 그와 같아서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아 모두 일류대학에 보냈고, 덤덤한 성격의 남편은 그럴듯한 자리의 공직에서 돈도 잘 벌어오며 자신에게 잘 해준단다. 그런데 이 친구는 맥주 두어 잔을 마시고 나면 늘 내게 주정을 늘어놓곤 한다.
“언니, 나는 모범적인 여자는 싫어요. 현모양처는 더더욱 정떨어져요. 난 화끈한 여자가 되고 싶어요. 있잖아요. 왜 남자들이 말하는 죽여주는 스타일의 여자요.”
그 친구의 얼굴과는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라 웃기지 말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팔자 좋은 소리라며 면박을 주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정말 절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젊은 시절 부유한 시부모님 밑에서 기가 팍팍 죽어가며 시집살이를 했고, 늙어가면서는 남편 시중을 들고 아들을 키워내며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전보다는 무척 수월해졌지만 지금도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 한통에 끔찍하게 긴장을 하는 것을 보면, 그는 늘 화끈한 여자의 삶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부모님 앞에서 발발 떨며 다소곳하게 “네, 네”하며 살았던 시절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멘다고 했다. 아내의 감정을 살피는 데는 빵점이었던 남편은 늘 부모님 편에 서 있었다고 했다. 늘 외로웠고, 가슴 터지도록 할 말도 많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남편이 외도를 하거나 돈이 없어 길바닥에 나 앉는 일만이 여자의 비극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아는 그 친구는 자기감정이 박탈당하는 그 외로움에 시를 쓰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어쩌면 시를 통해서라도 화끈한 여자의 근본을 풀어 놓고 싶었을 게다.
누가 화끈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시부모나 남편 또는 직장상사나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당하게 하며 사는 여자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리고 덤으로 폼 나는 매력까지 지닐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화끈한 여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 설악산으로 떠난 대학 졸업여행 때의 일이다. 우리는 캠프파이어를 열고 밤의 축제를 즐겼는데, 나는 거기서 밤새도록 불 주위를 돌며 춤을 췄다. 밤을 밝히는 장작불은 가슴을 녹이는 열정을 탁탁 튀게 했고, 발바닥을 화끈거리게 했다.
온 산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나는 정신이 아릿해지며 온 몸으로 잘잘 끓는 열을 토했다. 그날 밤. 나는 붉은 원피스를 입고, 내가 불이 돼 불을 돌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온 몸으로 춤을 췄다. 그것은 화끈함 보다는 미쳐 날뛰는 발광의 춤에 가까웠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고도 내 몸은 뜨거웠다. 그랬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온 몸으로 붉은 파도를 휩쓸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보고는, 어떤 관광객이 당시 인솔교수였던 김남조 선생님을 찾아와 며느리 삼게 해 달라고 했었다. 당시 그 추억은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지금도 김남조 선생님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건네는 말씀으로 남아있다. 너는 그런 화끈한 여자였다는 것이다.
젊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뜨거웠고 심심함을 견디지 못했다. 누가 봐도 화끈한 여자였다. 그러나 삶이란 그런 화끈한 불도 잔인하게 꺼뜨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삶’이란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등에 업고, ‘생’의 다리를 건너오는 동안 온 몸을 달구던 발광적인 불은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잘 녹지도 않는 그 얼음을 끌어오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내 젊은 날의 열정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지금도 마음만은 몇날 며칠을 붉은 원피스를 입고 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다. 화끈한 여자의 피도 아직도 건재하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끓는 피의 농도는 좀 약해졌을지라도, 나는 그 붉은 피로 시를 쓰며 앞으로의 삶을 살고 싶다. 그 친구가 말하는 ‘화끈한 여자’, ‘죽여주는 여자’는 아마도 현실 속에서가 아닌 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그 절망감. 시라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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