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정겹고 소중한 말이다. ‘한국인은 밥 힘으로 산다’고 한다. 살고 죽는 것이 밥에 달려 있다. 밥은 곧 생명이다.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 만약 누군가 “넌 내 밥이야”란 얘길 듣는다면 불쾌할 것이다. 상대방의 손아귀에 놀아난다는 뜻이 담겨 있어서다. 누구의 밥이 된다는 일은 의미 있을지 몰라도 밥이 돼야 하는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 않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왜 내가 희생하며 다른 사람들의 밥이 돼야 하냐”고 의문을 달지도 모른다.
지난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으며,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밥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추기경께서 굳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일을 왜 자청하셨을까? 신자라지만 아직도 너무나 부족한 필자의 입장에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추기경님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추기경님은 자신의 몸이 씹히는 고통을 통해 이웃들에게 힘과 영양분을 주는 존재이길 희망했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 산다. 밥은 사람을 살린다. 가톨릭교회는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먹고 산다. 예수님은 몸소 생명의 밥이 되시어 교회와 우릴 살려 주신다.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밥맛이 나고 살맛이 난다.
주님은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 안에 오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란 밥을 먹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기꺼이 밥이 되어 부활생명을 나눠주신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살려야 한다.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의 양식이 돼야 한다. 남북화해를 위한 민족의 밥이 돼야 하며, 인종과 종교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세계 평화의 밥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이 교회의 밥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의 밥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순교의 제물, 생명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릴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은 그리스도인의 신성한 책무다.
극도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사회에서 쉬운 얘기는 아니다. 험난한 길임에 분명하다. 솔직히 누군들 자신이 손해보고 희생당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는가. 세속적인 잣대로 바보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바보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짚고 넘어간다. 추기경께서 남기신 어록 중에 또 한 가지가 “나는 바보”였다. 자신을 바보로 불렀다. 감히 추기경님의 인품과 영성을 가늠한다는 게 가당하지도 않지만 스스럼없이 자신을 ‘바보’라 했던 김 추기경의 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았으며, 바보같이 남을 도와야 세상을 구원한다는 게 이유였다.
진정 이웃과 세상의 밥이 되길 원했고, 스스로를 바보라 불렀던 김 추기경. 자신과 자신의 울타리 챙기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참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자신의 부귀영화와 행복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웃과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고 겸손하게 낮추는 자세야말로 신앙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일 것이다. 푸른 5월도 이제 막바지다.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밥이 되셨고 추기경님이 그 길을 따르셨듯이 우리도 함께 그 길에 첫 발을 내디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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