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첫 구절은 신의 선물이다.”
상징시(象徵詩)의 한 정점을 이룬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Ambroise-Paul-Toussaint-Jules Valery)가 남긴 명언이다. 이 말은 영감과 창조적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들려주는 예로 문학도들 사이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발레리의 이 말을 본 따 저널리스트들은 ‘기사(記事)의 리드는 신의 은총’이란 말로 바꿔 말하기도 한다. 기사 내용의 정수(精髓)를 담은 첫 머리의 도입구절(opening paragraph)인 리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기사 리드는 기사내용을 요약하고 초점을 알려줄 뿐 아니라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갈수록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바람이 분다 / 살아봐야겠다 //”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cimetiere marin)」 첫 구절을 읽으며 머릿속이 씻겨 내려가는 체험을 한 필자에게 그가 남긴 묵상의 한 조각은 ‘첫 걸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금언(金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창조적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시작’은 언제나 더할 수 없는 고통이며, 끝 간 데 없는 고통 뒤에 오는 환희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창조적 파괴’라는 말에 매혹돼 기행(奇行)을 서슴지 않는 이들에게 연민이나 동정 이상의 공감을 느끼기도 했다. 대학시절, 성긴 천으로 짜인 망태기 같은 가방에 다기(茶器)와 갖가지 술병을 넣어 다니며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자리를 펴고 이야기마당을 벌리던 한 선배의 모습이 신비롭게 다가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창조 작업에 대한 필자의 소박한 믿음은 오래도록 지속돼 왔다. 교회 안에서 이러저런 일을 하면서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지어내신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보는 기회가 잦아지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놀라운 창조 사업의 한 가닥이라도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아니 욕심에서였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생각의 끝은 늘 한 곳으로 이어졌으니, 하느님의 ‘창조’를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 ‘창조’를 지키고 보전하는 일이라도 내 몫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순간순간 돌이켜보면 이러한 마음을 심어주신 것도 하느님 창조 사업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문득 깨달으며 창조적 능력의 부족을 한탄할 게 아니라 자신에게 내재된 창조의 씨앗을 찾고 키워나가는 노력의 부족을 탓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렇듯 ‘창조’의 신비로움, 거룩함에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필자에게 역겨운 수사(修辭)들이 들리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바로 ‘창조적 파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등장한 4대강 살리기 사업이 그것이다.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져가던 한반도 대운하의 불씨를 이어받은 이 프로젝트는 순수하게 홍수예방과 하천환경 개선을 위해서라고 한다. 정부는 이 사업이 대운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내용을 조금만 뜯어보면 이름만 바뀐 대운하 사업임을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어(詩語)의 오염에는 절필과 무관심으로 항거할 수 있다지만 생각과 정신의 오염에는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하느님의 은총, 그 다음은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고 말한 발레리의 말이 하느님 창조 사업에의 동참을 재촉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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