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당시 국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늘 독서를 강조하셨다. 독서야말로 미래를 위한 아주 강력한 투자라며 거의 외치는 수준으로 열을 올리시곤 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듣는 이는 없었다. 우리가 반응이 별로 없자 선생님은 책읽기 숙제를 내기 시작했다. 「무정」,「메밀꽃 필 무렵」, 「백치 아다다」 등이 생각난다. 그저 한국어 소설이었다는 것만 남아있을 뿐, 열심히 읽었다는 기억은 없다.
그때는 책이 흔하지 않았을 때라 한 반에서 열 명씩 돌아가면서 읽고 독후감 숙제를 제출했다. 독후감은 마치 소설 같았다. 대충 책을 훑어보고 내용도 모르는 채 친구들과 짜깁기를 해서 엉터리 독후감을 만들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걸 읽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참 운 좋은 학생들이었다. 그 작은 시골 중학교에서 책읽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독서를 시킨 선생님을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진학해서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반 무렵, 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읽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성에 막 눈을 뜨고 ‘연애편지’라는 것을 쓰기 위해 어렵게 구해온 책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구절을 공책에 베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독서’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좋은 시절을 불행하게 보내버렸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명색이 ‘국문학도’인데도 독서가 너무 짧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용돈의 대부분을 책이랑 바꿨으며, 난 책들을 현금보다 귀중하게 보관했다. 그 시절 「어린왕자」, 「데미안」, 「김소월 시집」 등에 감동을 받았고, 내 몸처럼 늘 끼고 다니는 책이 「현대문학」이었다. 아무리 용돈이 딸려도 「현대문학」은 샀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팔처럼 겨드랑이 사이에 그 책을 달고 다니며 자랑스러워 했었다.
밤새워 책을 읽었다. 밤새워 무엇인가 쓰고 지웠다. 홀로 감격하고, 홀로 울고, 홀로 슬퍼하고, 홀로 장엄한 미래를 위해 밤새 쓰러져 있던 갈기를 일으키던 시절도 그때다. ‘내가 만약 글을 쓴다면 한국이 아닌 전 세계를 손안에 쥐게 될 것’이란 야망도 그 시절의 나를 뜨겁게 했다.
어느 해 가을. 학교 앞 서점에서 플라톤의 「잔치」를 샀다. 적어도 철학적 바탕을 이루고 난 뒤에야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겨드랑이 사이에 그 책을 끼고 다니며, 친구들 앞에서 ‘난 이렇게 어려운 책도 읽는다’는 자만심을 세웠다. 우쭐했다. 그러나 고백하건데 나는 지금도 그 책에 대해 잘 모르며, 성실히 읽은 바도 없다.
노란 포장의 이 책은 지금도 내 책장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책을 볼 때마다 슬며시 웃음이 난다. 손에 가락지 하나 끼듯, 장식으로 사용했던 책이다. 그런데 밉지가 않다. 책으로 사치를 부리려던 내 어린 시절의 과장이 어쩐지 귀엽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우리에게 소설을 가르친 분은 안수길 선생님이셨다. 단아하고 깊은 눈매를 가진 그 분은 책읽기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보이시곤 했다. 「책 한권에 밥 열 두 그릇」이란 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시절엔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고 책 한 권 사기도 쉽지가 않았다. 책보다는 밥이 더 중요했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책이야말로 밥이 되는 것이며, 그 밥이야말로 영원히 인간다운 생명을 유지시킨다’고 강조하셨다.
책을 보면 지금도 그분 생각이 난다. 중학교 때 책읽기를 가르쳐 주신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면, 대학교 때는 안수길 선생님께서 ‘책이 밥이다’는 사뭇 상징적인 이미지의 감동을 내게 안겨주셨던 것이다.
그 후 책을 살 때마다 나는 밥 한 그릇을 산다는 생각을 했다. 매우 행복한 생각이다. ‘책은 정신의 양식이다’는 사무적이고 도식적인 이야기가 아닌, ‘책 한 그릇에 밥 열두 그릇’이란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내가 받은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 아니겠는가. 내 인생의 위기에 펼쳐 들었던 ‘성경’을 이제는 내 생의 길잡이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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