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왝 더 독(Wag the Dog)’이라는 영화가 있다. 재선을 노리는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스캔들을 무마하고자 미디어조작을 하는 과정을 그린 코믹 영화다. 백악관은 가상의 전쟁을 만들어 언론의 관심을 돌리고 조작된 해결을 보여주는데 국민은 그것을 믿고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내용이다.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이 아이러니한 영화 제목은 사실을 왜곡하여 잘못된 정보를 주는 ‘미디어’가 거대한 대중을 좌지우지하면서 흔들어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각종 미디어가 쏟아내는 넘치는 정보를 접하는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또 무엇을 모르고 있는 걸까? ‘많이 듣고 볼수록 더 모른다’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능력이 있다 한들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분석하고 비평한다면 거기에서 나온 결론은 설득력을 잃게 마련이다. 계속적으로 특정 이슈를 만들어내거나 혹은 무마하고 왜곡하는 미디어는 ‘사실’을 알 수 없게 한다. 더욱이 인터넷의 힘은 평범한 시민들을 모두 정치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이웃끼리 즐겁게 먹고 마시다가 어느 순간 정치적 이슈가 대두되면 돌연 ‘적’이 되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모이면 당연히 정치현상이 나타나고 삶은 정치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치’는 ‘일상’이고 ‘일상’이 ‘정치’인지도 모르겠다. 종교인도 국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정치는 세속적이고 권력투쟁의 장으로 부각되기에 종교인은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신자들은 가끔 묻는다. “수녀님도 정치에 관심이 있으세요?” 그럴 때 “정치는 정치인의 몫이지요”라고 초연하게 답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정치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크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갈등과 반목을 야기하는 ‘정보’다. 서로가 생각이 달라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삶의 가치와 정치적 이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 비방하고 헐뜯게 만드는 ‘정보’는 진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실종하게 만든다.
프랑스의 정치학 교수인 자크엘룰은 정치와 테크놀로지 그리고 미디어는 우리를 ‘비인간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지적 논쟁도 가벼운 선전’처럼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한탄한다. 인간복제도 결국 테크놀로지가 있기에 도덕적 판단 없이 수용하고 있다며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현대의 매스미디어로 인해 진짜 커뮤니케이션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진짜’가 무엇일까? ‘좌’나 ‘우’ 그리고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서로를 선긋기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을 보며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신앙인은 어떻게 ‘정치’를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우리 사회를 바라볼까?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거짓은 진실이 앞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이미 세상의 절반을 덮어버린다”는 무서운 말을 하였다. 거의 매일 듣고 보는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우리는 거짓에 저항할 수 있는 힘마저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정보전쟁 속에서 ‘진짜’와 ‘가짜’가 싸우는 가운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진실’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미디어가 주는 ‘정보’로 ‘안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짜’를 알아보는가? 미디어는 읽는 만큼 보인다. 무엇을 말하는지에 주목하기보다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가 아닌 어떤 맥락에서 재현되고 있는지 읽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신앙인으로서의 노력이 절실하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진실을 바라보는 잣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도 언제나 세상의 논쟁 중심에 계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숱한 비난과 협박 속에서도 언제나 아프고 소외된 자들의 손을 잡아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미디어시대의 진실을 읽어내고 묵상과 기도를 통해 ‘진짜’를 찾아야 한다. 미디어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꼬리를 흔들며 우리의 몸통을 흔들어대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모셔진 ‘예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물기를 바랄뿐이다.
“마음이 양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 우리 마음을 주님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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