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못났다. 살아온 행색이 말이다. 사람의 기억력은 묘하다.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일을, 아니 기억하기도 싫은 일일수록 기억엔 더 오래 남는다.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기억의 세계도 그러하거니와, 남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렇다. 어디선가 내 후각을 자극했던 매력적인 향수내는 그 출처가 가물 가물해도, 언젠가 코를 찔렀던 구취는 그 제공자가 또렷이 기억되는게 일반적이다.
할아버지의 작업복은 흰색 고무신이나 짚신에 바지 저고리가 전부였다. 달구지라도 끌면 호사라 했다. 그나마 남의 논 부쳐먹지 않고 제 논마지기라도 있으면 자식들 앞에서 큰 소리 칠만 했다.
아버지는 늘 똑같은 작업복을 입으셨다. 목돈 주고 장만한 자전거는 소장 애호품 가운데 세 손가락에 들었다. 아들은 땀에 절고 퀴퀴한 냄새가 나던 아버지의 작업복이 가끔은 부끄러웠다. 그러나 사시사철 900도가 넘는 불구덩이 옆에서 쇳물을 녹여내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본 뒤로는 땀에 절은 옷이 자랑스러웠다. 퀴퀴하다던 그 냄새도 아버지를 기억하게 하는 인연의 끈으로 남았다.
아버지는 소심하셔서 큰 돈 벌 기회도 놓쳤다고 했다. 친구들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해 크게 성공하였을때 아버지는 권유를 뿌리치고 하던 일을 고집했었다. 그나마 맨주먹으로 일군 집안을 행여 말아먹지나 않을까 겁이 났었다고 했다. 그래도 자식들 대학 교육 제대로 못 시켜줘서 미안하다고 하기 보다 그만큼 키워준게 어디냐고 늘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아버지는 참 모르고 사셨다. 지금 세상 물정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일희일비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참 난감하다. 들어줄 얘기도, 할 얘기도 정도가 있다. 그걸 지키는 것이 상식이고 예(禮)다. 사람이 하고픈 말 다하고 살 수는 없다. 때론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들어도 못들은 척 하는게 다반사다. 이런 기본을 무시하고 들이댄다면 누구 말처럼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조언도 진심어린 배려가 있을때 힘을 얻는다. 충고도 충고 다워야 귀에 들린다. 그러려면 말조심 해야 한다. 아픈 이가 왜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는 누구 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아파서 제일 답답하고 서러운 이는 당사자다. 헌데 왜 아팠었냐고, 왜 그랬냐고, 그럴 수 밖에 없었느냐고 다그쳐 묻는 것은 매몰차다 못해 때론 몰상식해 보인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할 참인가. 아무리 앞 뒤를 싸매고 덧씌워도 한번 베인 상처는 흉으로 남는다. 남이 한 시대를 살아온 흔적을 ‘부끄럽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로 우스운 꼴로 치부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볼성사납다. 어려웠던 시절,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을 택했었다고 애써 인정한다느니, 그때 일을 이제 와서 비평할 마음은 없다느니 하는 말이 더 우습다. 뺨 치고 얼르는 것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이런게 소통인가. 다름을 찾고, 다름을 확인하기 위한 목소리는 아름답지 못하다. 교만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는 참 못났다. 그래도 고맙다. 그때 그 자리에 있어줘서. 그래서 지금 내가 있다. 하물며 남의 집 할아버지, 아버지 못난 행색을 흘겨보듯 지금 무어라 시비거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애시당초 칭찬은 언감생심이다. 할 말은 하시라. 그만한 자리를 펴지 않았는가. 하되, 남의 집안 사정 두고 시시비비 가리려 하지 말라. 고약하다.
이쯤에서 듣는 일도 그만둬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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