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가 태어났다. 강보에 싸여 누워 계신 예수 아기가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 오셨다. 그 어느때보다 어렵고 힘들었던 1998년의 성탄절을 맞이한 것이다. 이 아기 예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정화시켜 주시는 말씀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경제난국의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오는 모든 고뇌를 털어버리고, 오늘만은 성당에 꾸며진 구유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무릎 꿇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보면서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말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자체이신 아기 예수님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2000년전 베들레헴의 외딴 마굿간에 우리도 서 있어야 한다. 구유에 꾸며진 성탄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성부와 성자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한다. 구유에 누워있는 이 아기는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기 예수님 탄생의 현장은, 부조리한 인류 역사의 전형이었음을 묵상해야 한다. 여관에서 문전박대 당하는 마리아와 요셉,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베들레헴의 마굿간, 초라한 차림의 목동들, 감당하기 어려운 세금에 짓눌린 백성. 그리고 유아 대량학살과 끝이 없는 헤룻의 폭정 등 온갖 부조리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그런 세상 안에서, 세상의 조건을 수용하면서 살아가셨다는 사실을 새겨봐야 한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로, 피난민으로, 반대받는 표적으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행려자로 모진 삶을 사시면서도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수많은 병자들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고쳐주시고, 온갖 장애자들을 성하게 하시며,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셨다는 점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도 불의와 어둠이 짙게 드리운 세상 조건을 수용하시면서도 그 어둠을 걷어 내신 삶을 본받아야 한다.
구유 앞에서 침묵 중에 묵상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던 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보이는 자연이 오염된 것에는 참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양심이 오염된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는 어느 교구장의 지적도 새겨 들어야 한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탄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해봐야 한다. 불의와 부정이 만연한 세상의 한가운데, 가난한 약자로 태어나셨지만 종국에는 그 부조리의 어둠을 걷어내고 승리자가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나도 그분 뒤를 따르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나선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는, 선의를 가지고 사회와 우리 주변을 개혁하고 정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강력한 추진력을 불어 넣어 준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나서신다는 것은, 유혹에 빠진 아담이 에덴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자신을 숨겼듯이, 자신을 숨기며 그분에게서 돌아선 인간에게, 그 길이 그릇된 길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고, 인간을 유혹하는, 악을 찾아내고, 그 악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제삼천년기) 7항)는 가르침도 가슴에 와 닿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성탄은 어떠한지 한번 돌아보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전하던 니꼴라오 성인과 달리 산타클로스를 그저 상업적인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 책임은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 또 이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선물에만 정신이 팔여 있지는 않는지 다시금 되돌아 보아야겠다.
또한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가진 자들의 호화 사치생활은 그 도를 더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밥그릇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건만 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날씨 만큼이나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1998년 성탄절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이 살으셨던 가난의 영성을 본받아야 한다. 분수 이상으로 사치하는 일, 필요 이상으로 낭비하는 일, 내 자신의 구원과 공동선을 위해서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잡다한 일에 마음과 정신을 쏟고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가난하게 사신 주님과 같이 가난 속에서 기쁨을 찾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일 것이다.
무엇보다 올해 성탄절은 뜻깊다. 2000년 전 육화의 신비 속에 인류를 찾아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새롭게 기념하게 될 2천년 대희년 준비의 마지막 문턱에서 맞이하는 성탄절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성부의 해를 맞아 우리 모두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면서, 그분의 은총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사회가 진정 하나되어 참된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다. 21세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남과 북이 하루빨리 분단의 장벽을 뛰어 넘어 참된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데 일조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성부의 해」성탄절은 매년 되풀이되는 껍데기 행사가 아니라 내 마음안에서 준비되고 이웃안에서 실천되는 나의 새로운 탄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 자신의 새로운 탄생이 없는 성탄은 무의미 할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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