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원로정치인 미야자와 이치는 우리 나이로 올해 80살이다. 우리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총리직까지 역임한 그가 86년 제3차 나카소네 총리내각의 출범과 함께 일본경제의 사령실인 대장성(大藏省)의 장관직을 수락한 「사건」은 당시 일본에서 커다란 화제거리로 회자된 바 있다. 지금도 장상(藏相)직을 맡고 있는 그는 청빈의 길을 걸어 온 노정객으로,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이런 미야자와가 지난 95년, 일본의 한 주간만화잡지인 「빅코믹 스피리트」에 정치칼럼을 연재해 눈길을 끈 바 있다. 거물ㆍ중 거물인 「점잖은 체면」의 미야자와가, 우리 가치기준으로는 코흘리개나 보는 천박한 책인 만화잡지에도 칼럼을 기고한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이 잡지가 매주 140만부나 발행되는(지금은 약 90만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무시할 수 없는 미디어(media)」였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20일 우리 문화관공부는 일본대중문화의 전면개방을 선언했다. 이에 각 매스컴은 톱기사로 일본만화의 유입에 따른 문제점들을 심각하게 「진단」하고 「걱정」했다. 결론은 우리 만화산업을 육성해 일본과 당당하게 겨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미사여구들은 당분간(어쩌면 영원히) 실현불가능할 것이 뻔해 보인다. 만화매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고서야 일본만화와의 경쟁은 커녕 벌어놓은 것마저 까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성세대의 대부분은 만화를 정보전달 매체로 여기기보다는 「청소면 법죄모방 교과서」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소년범죄의 경우 경찰조서엔 으레 『만화 등을 보고 범죄를 흉내냈다』는 조항이 필수적으로 삽입되는 나라, 검찰이 앞장서서 범죄집단 소탕하듯 만화유통체계를 단속하는 현실. 이런 토양에서 대중사회 미디어의 총아인 만화산업을 육성하자는 구호는 그야말로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의 소년만화잡지에다 칼럼을 떳떳하게 연재하는 날, 우리는 일본만화와 한판 대거리를 붙을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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