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름 기운이 완연하다. 장마 오기 전에 매실을 따야지 하고 벼뤘는데 오늘은 바람도 약간 불고, 해도 설핏해서 매실을 따보기로 했다.
이른 봄,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꽃을 피워 우리를 그리도 기쁘게 하더니 이렇게 열매까지 맺어주니 고맙고 신기하다. 하귤도 제 무게를 못 이겨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니 날 잡아 거둬야 할 것 같고, 앵두는 먹을 사람이 없어 그냥 놓아두니 새들의 잔칫상이 됐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나무들은 어찌 그리 때를 알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주는지….
어찌 나무뿐이랴! 보잘것없는 미물도 제 할 일을 알고 제 할 일이 끝나면 생을 마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환하고 질서 있게 돌아가는 이런 자연 앞에 서면 우리는 아주 작아지고 겸손해진다. 또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그리도 자연을 벗하여 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작자 미상의 다음과 같은 시조가 있다.
“십년을 경영(經榮)하여 초로삼간(草盧三間) 지어놓고/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바람과 달과 인간이 그냥 한 식구다. 깃들어도 빈 듯이 있는 바람과 달과 더불면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가 되겠지. 자연 속에 있으면 가진 것이 적어도 여유로워진다. 우리도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리라.
시원한 바람과 맑은 햇살을 즐기면서 매실을 거두다 보니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의 기쁨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아옹다옹 세속의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를 떨쳐 버리고 가끔은 자연 속에서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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