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 시간이 넘어 있었다. 혼자였다. 강남역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적당한 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면 슬프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슬픔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질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이 버무려져 있는 그런 슬픔인 것은 분명하다.
아침은 포도즙을 마신 것이 전부였고, 점심은 때를 놓쳤으며, 시간은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리가 꺾일 듯 약간의 공복이 주는 쾌감을 뒤로 하며 나는 주린 배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생금같이 내 눈에 뜨인 식당 이름. ‘대나무 밥’집이었다.
식당 이름에 끌려 그 식당으로 들어섰다. 어중간한 시간인데도 몇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나무밥이요.’ 나는 말했다. 어차피 그 집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대나무밥. 나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대나무밥….
내 앞에 대나무 밥이 놓였다. 대나무의 한 매듭을 잘라내 그것을 그릇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대나무 향기는 아주 미약했다. 그러나 조금 긴 대나무 그릇에 담긴 밥은 매혹적이었다. ‘누가 맨 처음 이 대나무에 밥을 하는 것을 생각해 냈을까.’ 나는 박수를 보냈다.
나는 대나무밥을 파먹으며 생각했다. 이 한 매듭이 자라는데 대나무는 얼마쯤의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나는 열세 번째 시집을 간행했다. 시집 한 권의 매듭은 시간으로 풀어야 하나, 열정으로 풀어야 하나, 아니면 계획된 것으로 풀어야 하나. 대나무의 매듭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다를 것이다. 바람과 햇살과 비를 맞으며 자라는 공간이 다를 것이며 그 대응방법도 매듭마다 달랐을 것이다.
시집도 그럴 것이다. 3년이나 5년, 혹은 7년의 거리를 두고 시인들이 만들어내는 시집의 매듭은 그네들의 생활과 경험, 그리고 시적 열정과 함께 모두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나도 그렇다. 열세 번째 시집은 나의 대책 없는 나약함이나, 무엇인지 모르지만 손끝에 독이 오르는 시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독의 결과가 이거냐?’
그렇게 냉혹하게 묻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독을 잘 달래고 어르고, 그래서 그 독을 쭉 뽑아내 부드러운 말로, 가능한 단순한 언어와 낮은 목소리로 고백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했다는 것이 나에겐 중요하다. 지리멸렬 붙들고 있던 어둠을 확 털어내고, 거기 빛을 들여 놓고, 그리고 웃음까지 깃들게 하는 시의 새 모색을 이 시집에서 감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무 어두웠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둠을 껴안고 살았다. 그렇게 살았더니 우연히 빛이 들기 시작했고 웃음이 튀어 나왔다. 빛과 어둠은 공전하는 법이다. 생이 어두웠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밝아지기 마련이다. 생은 대나무밥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어느 한 시대를 잘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따듯한 밥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행운이지 않겠는가.
나도 앞으로의 삶을 그렇게 살고 싶다. 따뜻한 대나무밥 그릇처럼.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생각해 보면 너무 억세게만 살아왔다. 이제는 하느님 보시기에 ‘그래 그 정도가 좋다’라고 하실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살고 싶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시기에 도달했다. 직장은 이미 정년을 했고, 가정에서도 치르지 못한 일들이 남아있다. 가끔 스스로 감당 못하는 감정에 휘몰려 속을 게워 낼 때도 있다. 나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를 명백하게 바라봐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10년 후라고 중요하지 않겠는가. 다만 늘 이 시간, 바로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다. 그것만이 지금의 나를 끌고 가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한 그릇의 대나무밥을 깨끗이 비웠다. 배가 부르다. 기분도 부르다. 나는 몇 번째 매듭의 대나무밥을 먹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몇 번째 시집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사는 것. 열심히 치열하게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을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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