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눈을 뜬다. 창밖으로 검은 나뭇잎새가 수런거리며 흔들린다. 조금쯤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일까. 나뭇잎들이 막 잠에서 깬 내 방의 정적을 건너다보며 얕푸른 어둠속에서 흔들린다.
그 그림이 참 좋다. 수묵화처럼 무겁고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가 색을 칠하지 않아도 화려하다. ‘아 좋다!’ 나는 말한다. 달콤한 포옹에서 풀려난 것 같은 감미로움이 이른 새벽 창 너머의 그림으로 따뜻하다.
곧 빛이 흘러들 것이다. 그래 빛이다. 검은 실루엣으로 흔들리던 나뭇잎새의 몸에 햇살이 미끄럽게 흘러내린다. 누군가가 내 창 앞에 아침을 배달하느라 밤새 분주했겠다. 햇살이 눈부시게 나뭇잎들 위에 담겨서 반짝인다.
창을 연다. 가벼운 바람이 상쾌하다. 싱싱한 여름 잎들의 초록내음이 물씬 내 코에 스친다. 죽는다면 이것을 보지 못하리. 그래서 삶은 얼마나 풍만한 것인가.
나는 운동화를 신고 대문을 나선다. 동네 작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려 한다. 이 아침시간이 참 좋다. 아침은 축복 같은 것이다. 한 잔의 생명수 같은 아침.
우리 동네는 학교가 많아 작은 공원을 가기 위해서는 이 아이들과 섞여 걸어가야 한다. 자기보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조잘거리며 걷는 초·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들 틈에서 나는 늙은 학생이 되어 함께 걸어간다. 어설픈 멋을 낸 여중생들의 사춘기적 환상이 그들의 웃음소리에서 느껴지곤 한다. 내 걸음에 힘이 실린다.
그들의 소리가 멀어지고 곧 작은 공원에 도달한다. 아무도 없는 그 공간이 나는 너무 좋다. 후박나무와 마로니에가 우람하게 자라 그 잎들이 넘실거리는 곳. 나는 그 아래 벤치에 잠시 앉아 심호흡을 한다. 가벼운 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나무들을 바라보는 일에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부채만한 잎을 가진 후박나무들에게 ‘참 시원하게도 생겼다’며 말을 건다. 큰 키에 큰 잎, 어디를 봐도 인색한 곳 하나 없는 후박나무다. 저 나무, 전생에 많은 덕을 베풀었던 탓일까. 후박나무에 기대면 등이 편안하고 몸이 개운해진다. 비라도 뚝뚝 떨어지면 그 소리가 얼마나 시원하고 너그러운지. 그만한 남자도 드물까 싶다.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랑할미새 한 마리가 잎에 앉아 꼬리를 까딱까딱한다. 문득 노랑할미새를 가르쳐 준 남자도 떠올려 본다. 녹음이 절정에 이른 여름이다. 여느 여름보다도 녹음이 살찌고 튼실해 나무 하나가 열 나무 구실을 하는 것 같다. 아 좋구나. 나무가 없다면, 음악이 없는 것과 같은 지옥일 것이다.
나는 집에서나 거리에서나 나무들을 보며 ‘좋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한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저렇게 시퍼렇게 녹음진 잎들이 정말 좋다. 마치 연애에 빠진 듯하다. 나도 젊었을 때는 자연이 좋다며 감격하는 이들을 경멸했었다. 사람이 좋지, 어떻게 나무나 새나 자연이 감동스럽단 말인가. 그런 것을 보면 자기 부족에서 오는 헛된 멋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좋으니까 그 사람과 자연을 보고 싶을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같이 보는 사람이 없어도, 자연 그 자체로 나뭇잎 하나로 거대한 녹음의 빌딩을 보는 그대로가 좋다.
햇살비치는 창이 좋고, 한 잔의 커피가 좋고, 혼자 적적한 거리를 걷는 것이 좋고, 맛있는 새우요리가 좋고, 거리를 걷다가 시시한 싸구려 옷 하나 사서 집에 가져오는 것이 좋고, 지하도 상가에서 만 원짜리 구두를 사는 것이 좋고, 친구와 시시덕거리는 것이 좋고, 그리고 혼자 책을 보는 것이 좋다. 세수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원고를 쓰면서 집안에 앉아 있는 것도 좋고, 약속 없는 오후도 좋다.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는가. 만족해서 즐거워하는 내 품목들이 너무 변해버렸다. 나는 늘 약속이 그리웠다. 젊은 날, 난 약속이 없는 날의 오후가 슬펐다.
편안하게 앉아 창 너머 녹음을 바라보는 일이 달콤하다. 섹시한 남자 하나를 만나 살이 으깨어질 정도로 포옹을 하는 기분보다야 조금 약할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여름의 모든 자연과 사랑에 빠져있다. 오랜만에 아프지 않고 아름답기만한 나의 연애에 나 홀로 축배를 들고 싶다. 사람과의 연애는 늘 비참하고 너무 아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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