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당’(如己堂)에 다녀왔다. 일본 나가사키 순례길에서다. 지난 9일 나가사키시 평화공원에서 열린 원폭 64주년 평화기념제에 참석하는 호사도 누렸다. 평화기념제에 이어 나가사키대교구 주교좌 우라카미성당에서 봉헌된 평화기원미사 역시 감동이었다.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평화’와 ‘이웃사랑’이라는 하나의 염원을 품고 바치는 묵주기도와 미사는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의 진면목을 어김없이 보여줬다.
나가이 다카시(永井 士) 박사가 생의 마지막 3년을 보낸 ‘여기당’은 다다미 두 장의 한칸방 판자집이다. 북쪽 벽에 향대와 책장을 달았고, 동과 남쪽은 유리문으로 우라카미성당을 향하고 있다. 나가이 박사는 이곳에서 ‘영원한 것을’ ‘묵주알’ 등 10여 권의 책을 쓰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문병객들을 맞으며 인류의 평화를 호소했다.
원자야(原子野)를 ‘꽃피는 언덕’으로 만들기 위해 인세 수입으로 3년생 벚꽃 1000그루를 심어 지금도 봄이면 ‘나가이 1000그루 벚꽃’들이 우라카미 언덕을 환하게 장식한다.
“나는 곧 찾아냈다. 부엌이었던 장소에서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타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옆에는 십자가와 붙은 묵주가 있었다. 타고 남은 바케쓰에 아내의 뼈를 주어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묘까지 갔다. 아내가 내 뼈를 안고 갈 예정이었는데…. 운명이란 모르는 것이다. 내 팔 안에서 아내가 바삭바삭 인산석회의 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이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이 들렸다.(‘묵주알’ 중에서)
원폭의 처참함을 몸소 겪은 나가이 다카시에게 평화는 그저 구호나 어느 순간 이루어야 할 이상일 수 없었다. 그에게 평화는 곧 생명이었다. 생명은 지금 당장 실현되어야 한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토록 절실하고 소중한 평화를 온 세계에 전하기 위해 그는 책을 쓰고 문병인들을 맞았다. 온몸이 마비된 그에게 손이라도 쓸 수 있음은 더 할 수 없는 은총이요 행운이었다.
나가이 박사는 말한다. “원수라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못할 때까지 사랑하십시오”라고. 그리고 외친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한 개의 바늘이라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미 무기를 가진 자는 평화를 위해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1951년 5월 1일 선종 당시 일본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2만여 명의 조문객이 운집했다고 전해진다. 매년 16만 명의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는다.
여기당 옆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에선 그의 말년 활동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여기애인(如己愛人)’ 정신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나가이 박사가 그린 딸 카야노의 그림을 보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열에 녹아내린 아내 미도리의 묵주 덩어리는 핵무기의 가공할 무서움에 진저리치게 한다.
창문으로 들여다본 여기당 내부. 바짝 마른 몸에 병색이 완연한 나가이 다카시가 누운채로 그의 두 자녀인 아들 마코토, 딸 카야노와 함께 있는 모습이 겹쳐진다.
“평화는 나가사키로부터. 그만하세요. 전쟁만은 말아주세요. 나는 곧 연필을 잡고 나가사키 마지막 날의 정경을 조금도 꾸미지 않고 조금도 없애지 않고 그대로 쓰기 시작했다. 적어가는 상황 하나 하나에 돌아가신 분들의 모습이 보여 북받치는 눈물에 목이 메어 어느새 로사리오를 잡고 기도를 드린다…”(‘평화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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