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나이쯤 되면 자식들을 모두 혼인시키고 부부끼리 안정적으로 살기 마련이다. 여기서 안정적이란 말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얼마 정도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으며, 주변에 이렇다 할 걱정거리가 적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거의 다 그렇게 산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심심하다고. 늙은 아내를 바라보는 일, 늙은 남편을 바라보는 일이 싱겁고 느낌조차 없단다. 그래서 늘 ‘이게 뭔가’, ‘어떤 짜릿하고 신나는 일이 없을까’라며 덤덤하게 웃는단다.
인생은 원래 짜릿한 게 아니다. 오히려 덤덤하고 재미없는 것이다. 재미? 사실 그것은 너무나 과분한 욕심이다. 그들이 말하는 재미는 젊은 날에 모두 까먹은 밤 같은 것이다. 하얀 속살을 다 파먹은 밤 같은 것이다.
젊은 날 고생만 했으니 무슨 재미가 있었겠느냐고 말하지만, 생의 재미는 누구에게나 고르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이라고 하늘과 햇살과 꽃과 새가 없었겠는가. 그저 정신 놓고 사느라 그런 무상의 선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살아 온 그 엄청난 예술품들을 이제야말로 넉넉히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노년은 결코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재미없다고 불평만 하며 심드렁하게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마치 생에 대한 사랑을 다 끝낸 것처럼 보내는 친구들 말이다. 여기서 정말 보석같이 아름답게 사는 내 친구 부부를 소개할까 한다.
이들 부부는 퇴직을 하면서 여생에 대한 설계도를 만들었다. 그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이 ‘돈 많이 안 들이고 즐겁게 사는 것’이었단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까운 산에 가고, 자연의 변화를 즐기고, 식사는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뭐든 해 내고, 맛이 없어도 웃으며 먹고, 오후에는 돈 안 주고 구경할 수 있는 그림전시회를 가고, 젊은이들로 가득한 대학로를 걷고, 때로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 본적 없는 도시를 구경하고….
그러나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놀라워한 것은 두 사람이 일주일에 한 권씩 책 읽기를 꼭 지킨다는 사실이다. 책 목록을 정하고, 읽고, 독후감을 써보고…. 더욱 예뻐 보이는 것은 자식들에게 전화보다 편지를 더 많이 쓴다는 사실이다. 언제 우리가 자식들이나 혹은 친구들에게 고요히 마음을 다듬어 편지 한 통 써본 적 있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활동 중에서는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어려운 고시(古詩)를 서로 읽어주는 것도 있다. 이번 달에 읽은 시는 이옥봉 시인이 노래한 아름다운 절창이었다.
‘근래의 안부는 어떠신지요 / 사창에 달 떠오면 하도 그리워 / 꿈 속 넋 만약에 자취 있다면 / 문 앞 돌길 모래로 변하였으리’
1550년에서 1600년 사이의 생을 살다간 아름다운 시인 이옥봉. 그는 보고 싶은 애인의 창가를 너무나 많이 밟아 돌이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노래했다. 얼마나 임을 그리워했으면 돌이 모래가 되도록 임의 창가를 맴돌았을까.
나는 이들 부부가 명품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시를 주고받는 모양새가 처음엔 어색하더니 지금은 재미있단다. 그러나 더 욕심을 내자면, 그들 부부가 손잡고 함께 성당에 기도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
사실 나이 들어가면서 가장 준비해야 할 것이 ‘죽음’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기다려야 하기 마련이다. 미술관에 가고 영화를 보고 시집을 읽고 편지를 쓰는 것도 좋겠지만, 부부가 하나의 믿음을 갖고 겸허히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그 친구 부부에게 성경과 성가책, 묵주기도서를 선물한 적이 있다. 기쁘게 받기는 했지만 선뜻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다. 명품인생을 살아가는 그들 부부에게도 언젠가는 허전함과 두려움을 느껴 누군가에게 간절히 기대고 싶은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생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그 공포 말이다.
그들의 사는 모습에서 가장 큰 부분이 빠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나와 같은 신앙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나는 기다린다. 그들은 참으로 현명하다. 이들 부부가 반드시 하느님 앞으로 걸어가게 될 것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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