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찌는 듯 덥지만 조석으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니 가을도 멀지 않았다. 오는 가을을 재촉하는 풀벌레들의 노래가 뜰 안 가득하다. 이제 구절초나 쑥꽃 등 가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리라.
7년 전에 이사를 하던 날, 집안 열쇠뭉치를 넘겨주면서 전 주인이 내게 부탁했다.
“뒤뜰 창고 문을 반드시 잠그시고요. 마당에 잡풀을 자주 뽑아주세요. 그래야 잔디가 죽지 않습니다. 정들고 공들인 집이어서 미련도 많네요”라고 하시면서, 스페인제 잔디 깎는 기계를 선물로 주고 가셨다. 건성으로 대답했을 뿐 처음부터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라 생각했다. 현관문이나 대문도 잠그지 않고 살아온 우리 가족들에게 창고 문단속은 언감생심이다. 오히려 모든 창문에서 쇠창살을 걷어냈다. 언제 오실지 모를 도둑을 기다리며 스스로 갇힌 채 답답해서 말라죽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림처럼 마당을 덮고 있는 잔디도 보기는 좋지만, 그 잔디를 살리기 위해 부지런히 다른 풀을 뽑아줘야 한다. 잔디 편에서 보면 잡초가 될지 모르지만, 철따라 꽃을 피워내는 풀꽃들이다. 제비꽃이나 초롱꽃, 달개비나 잉크꽃, 봄에는 할미꽃이나 원추리는 물론 돌단풍과 산나리꽃 등 심지 않은 꽃들이 피어나는 기적을 매일 만난다. 까치산 자락의 터줏대감 격인 까치나 참새는 물론 산비둘기나 박새를 비롯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손님들이 아침마다 찾아왔다.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지 않은 덕이다. 나무에 앉아 벌레나 씨를 먹고 똥을 누면 그 전에 먹었던 씨앗들이 마당에 떨어져 꽃으로 피어난다. 우아한 수입 양잔디를 포기한 대가로 50여 종이 넘는 풀꽃을 계절마다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 하나 살 거야 / 저 혼자 꽃밭 보며 가만히 노래하며 살 거야.”(이정우 시/김정식 곡 「노래」중에서)
‘갇혀있을 것인가? 풀려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스스로의 몫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