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면 119를 부르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나 때문에 119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다. 늘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나 때문에 119를 불렀다. 나는 연이어 지방을 다녀오면서 피로에 지쳐있었다. 아침은 계란 두 개, 점심은 고구마 두 개로 때웠다. 저녁때쯤 시장기가 돌았고 아이들을 모두 불러 고깃집으로 가 저녁을 잘 먹었다.
집으로 몰려와 차 한 잔씩을 마셨다. 모두 돌아가고 막내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부터다. 배가 더부룩하고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예삿일은 아니다 싶어 소화제를 먹고 손바닥에 지압을 했다. 그러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한 시간 동안이나 사생결단 고역을 치렀다. 몇 번이고 속을 게워냈다. 탈수증까지 찾아왔다. 화장실에서 안방까지도 가지 못해 막내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누웠다.
그 뒤로도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렸다. 위장이 찢어질 듯 아파오면서 침대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기절 상태가 됐다.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고고한 정신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고, 지긋지긋한 통증이 육체를 지배했다. 나는 정신을 잃었고 막내가 119를 불렀다.
5분이나 지났을까. 119 대원들이 나를 업고 내려가 구급차에 실었다. 곧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이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에 가까워오고 있었다. 환자 등록을 마친 후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촬영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나는 ‘으악, 으악’ 울부짖으며 통증을 호소했다. 탈수증이 계속되며 입이 타들어갔다. ‘물 좀, 물 좀’ 나는 계속 애타게 간청하며 물을 찾았다….
눈을 떠 보니 그 새벽 시간에 아이들이 모두 와 있었다. 그 중 6학년짜리 손자 관우가 보였다. 사춘기에 들어선 녀석은 내가 손 좀 잡으려고 다가가면 ‘획’ 돌아서곤 했다. 그런 관우가 내 손을 어루만지며 불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아침 일찍 직장과 학교에 갈 사람들이다. 나는 ‘가거라.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지. 등교해야지’하면서 딸과 사위들을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관우도 학교에 가야하니 들어가라 권하자, 녀석이 갑자기 제 엄마 아빠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가 저렇게 아픈데 내가 어떻게 집에 가!’ 아픈 와중에도 속으로 ‘이놈, 꽤 괜찮은 놈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리와 감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픔이 살짝 가라앉는 듯 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약 처방을 받은 후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와서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기운을 차리기까지는 꼬박 보름이 걸렸다. 마치 살충제를 맞은 파리 같은 모습이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픽픽 쓰러졌다. 지난여름. 나의 아름다운 휴가는 그렇게 119 소동으로 끝났다.
그러나 얻은 것도 있었다. 바로 열세 살 손자 관우의 의리였다. 녀석은 자기가 병상을 지켜야 할머니가 위로를 받고 아픔을 이겨낼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저렇게 아픈데 내가 어떻게 집에 가!’냐고 항변하며 내 곁을 지켜준 든든한 남자.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내 마음에 꼭 드는 남자. 바로 내 애인 관우다. 아픈 할머니를 두고 집에서 편히 잘 수 없다는 ‘김관우’를 위해 새삼 나 역시 부끄럽지 않은 할머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119 구급차에 실려 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나는 다행히도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길로 영원히 먼 길을 떠난 이들도 많다. 그 누구도 자신하거나 자만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혹시 그날이 갑자기 찾아와도 늦지 않게 늘 ‘비상기도’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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