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길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위령성월 11월은 영원한 여행길을 준비하는 달이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미 있는 달이다.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언젠가는 내가 가야하는 길에 대해 묵상하고 하나하나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자연스레 주어진다.
모처럼 호젓이 배낭 하나 메고 일상을 떠나 여행길에 들어서니 그곳에 또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박하고 단순한 행복이 있다. 계획하고 준비한 것 하나도 없이 그냥 떠났을 뿐인데 그분께서 다 계획해 놓으셨고 준비해 놓으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시는 주님의 말씀이 현실로 다가와 어디를 가든 아름다운 자연의 멋스러움을 맘껏 누리면 되는 행복한 시간이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청산도에 이르니 아름다운 섬이 반갑게 맞아준다.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서편제의 한 장면을 어설프게 재현해보기도 한다. 오는 길에 정도리에 이르니 파도와 돌이 이루어내는 천상의 소리에 젖어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어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베드로 사도가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머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휴가의 묘미 중 하나는 부담감 없이 TV를 보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바보상자 앞에 앉아 바보가 되어 보는 것이다. 한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아야 된다는 생각에 뉴스만은 빠지지 않고 봤는데 언제부턴가 그것도 보지 않게 되었다. 사건과 문제투성이 세상 가운데 내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모처럼 뉴스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마음이 착잡하다. 내로라하는 지식층(?)의 국회에서 벌어지는 장면이 첫머리를 장식한다. 싸움판이다. 이런저런 안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법을 만들고 나라의 살림을 보살피며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복장에 맞지 않게 온몸을 던져 삿대질하는 우리의 어르신들을 보며 ‘저 사람을 내가 찍었단 말인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들의 속내를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혹시 우리의 청소년들이 볼까봐, 또는 외국인들이 이 장면을 볼까봐 부끄럽기 그지없다. “대화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대면하면 화부터 내는 것이 대화입니다” 고 했단다. 웃자고 하는 말치고는 너무나 씁쓸하다. 우리는 언제 우리를 위해 수고하는 그들을 위해 감사하며 존경의 시선으로 뉴스를 볼 수 있을까?
휴가의 또 다른 재미는 독서이다. 부담감 없이 아무 책이나 꺼내어 읽다가 잠드는 일이다. 위대한 성인전을 들으니 인도의 간디가 인상 깊게 다가온다. 간디는 위대한 사상가이며 정신적 지도자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변호사가 되어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독립을 일구어 낸다. 그러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융화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힌두교도가 쏜 총탄에 삶을 마감하게 된다. 생전에 그는 국가가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일곱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인상 깊게 다가왔다. 첫째는 원칙 없는 정치, 둘째는 윤리 없는 경제, 셋째는 노동 없는 자본, 넷째는 인격 없는 교육, 다섯째는 인간성 없는 과학, 여섯째는 양심 없는 쾌락, 일곱 째는 희생 없는 믿음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는 좋은데 그리스도인들은 싫다는 말로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하도록 한 위대한 위인이다. 비록 신앙인은 아니지만 그의 말을 새겨들었으면 한다.
살아 있는 성녀로 존경받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한 정치인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수녀님께서 하시는 일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데레사 수녀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가슴 찡한 대답인가? 그렇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앙인으로 부르신 것은 사랑의 삶을 살라고 부르신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마른 우물에서 두레박 물을 퍼 올릴 수 없다.” 자기 안에 기쁨이 넘쳐야 남도 기쁘게 할 수 있고, 자기가 먼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사랑이 있어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시킬 수 없으며, 진정한 행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결코 행복을 줄 수 없다. 더 깊은 사랑을 위하여 단 하루라도 길을 떠나는 11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11월에 길을 떠나니 모두가 친구요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사랑이더라. 산이 반기고 물이 맞이 해주고 바람이 감싸 안아주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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