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한 영화를 좋아하는 필자는 성경을 읽을 때도 전쟁 등 눈길을 끄는 장면이 많은 탈출기나 판관기 같은 부분을 오래 붙들고 있기 일쑤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로 시작되는 판관기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여호수아가 죽은 뒤 왕정시대로 넘어가기 전까지 판관들이 활동한 시대를 다루고 있다.
판관기의 주인공인 ‘판관’들은 ‘구원자’라는 뜻으로 왕은 아니지만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사법과 행정을 관할했다.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삼손이나 이스라엘의 판관 중 유일한 여성인 드보라, 가난한 농부 출신인 기드온 등은 모두 국가적 위기 때 군 총사령관 역할을 하며 외세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낸 전쟁 영웅들이다.
천하장사라고 부를 만한 삼손과 아울러 내 눈길을 끈 판관은 농촌 출신인 기드온이었다. 기드온은 농사를 짓던 중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억누르는 미디안족과의 전쟁에 나서게 되는데 그때 하느님은 묘한 방법으로 전쟁에 임할 군사를 추리게 하신다. 소집된 장병 가운데 “물을 핥아 먹는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고,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분명 엄청난 적을 눈앞에 두고 갈등했을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은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말년에는 타락하고 만다. 전리품 가운데 금으로 에폿을 만들어 자신이 사는 오프라 성읍에 두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에폿을 섬기며 잘못을 저지르게 방치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기드온은 자신이 평생 쌓은 명예를 스스로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민족을 다시 위기로 내몰리게 했다.
판관기는 어떻게 보면 복잡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 속에 놓인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에 담긴 신학 사상은 너무도 단순하다. 이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 벌하시지만, 회개하면 다시 구원해주신다는 단순한 진리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죄를 짓지만,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희망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판관기가 들려주는 또 하나의 진리는 하느님을 따르는 가장 기본적인 몸가짐은 겸손이라는 것이다. 꾐에 빠져 적에게 눈까지 잃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돌아본 삼손이나 에폿을 섬긴 기드온도 결국은 하느님 앞에 겸손함을 잃었기 때문에 어렵게 이룩한 영광과 평화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민족을 구원으로 이끌 판관을 자처하는 무수한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화려한 언사로 민족의 영광과 아름다운 미래를 들려주는 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쏟아내는 말에서는 사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라는 존재가 빠져 있고 오로지 거시적인 국가의 미래만이 띤다. 마치 사람 없는 미래를 말하는 꼴이다. 이는 달리 말해 하느님을 얘기하면서 하느님이 지극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 구원하고자 하신 사람이 빠져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경은, 겸손이란 하느님이신 분이면서도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시듯 사랑으로 인내하며 함께하는 것임을 들려준다. 참된 주님의 일꾼을 찾고 그를 통해 겸손을 배우고 하느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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