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일등만을 기억한다.”
몇 년 전에 자주 볼 수 있었던, 세계 일류 기업을 내세우는 삼성의 광고 문구였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최초, 최고, 최대 등 일등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오죽하면 별의별 일등 기록만 모은 기네스북이 있을 정도일까. 하지만 세상과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일등만이 아니다. 일등부터 꼴찌까지 모두가 세상과 역사를 움직인다.
이제 나는 최초가 아닌, 의미 있는 두 번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청년 백승덕의 이야기이다. 그는 지난 9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의 뜻을 밝혔고 지금 감옥에 있다. 그는 기자회견 때 발표한 소견서를 통해 가톨릭 신앙 때문에 병역거부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요약하면 이렇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부도로 말미암아 줄곧 힘든 생활을 해야 했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가톨릭대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바뀌었다.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부의장에 이어 교육위원장을 한 것을 보니 꽤 열심히 활동한 모양이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그가 선포한 복음이 무엇인지, 그를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고,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조급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가 믿는 복음과 정반대로 대치와 대결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복음 정신대로 평화와 연대의 길을 가고자 병역 거부를 선택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저는 일방적으로 부과된 의무에 단순히 동원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위기를 변명삼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탄압하는 데에만 열심인 국가권력의 모순을 고발하고자 병역거부를 선택했습니다. 이 저항을 통해, 의무와 순응 그리고 동원을 당연시하는 국가의 성찰을 요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전시상황이다”라며 모든 것을 덮어 버리려는 시도 앞에 “우리는 쓰고 버리는 일회용이 아니다!”라고 외치고자 합니다. 비록 기대할 수 있는 것이 크지 않은 저항일지라도 포기해야 할 만큼 작은 저항은 아닐 것이기에, 병역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당한 행위라고 가르친다. ‘간추린 사회교리’ 503항에 따르면, 국가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법률로 보장해주어야 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대체 복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군 복무가 의무인 경우에도 양심에 따라 모든 종류의 무력 사용을 거부하거나 특정한 전쟁에 참가하는 것에 반대하여 원칙적으로 군 복무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대안적 형태의 복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처럼 명백한 교회의 가르침에도 우리 교회는 가톨릭 신자로서 두 번째 양심적 병역 거부자 백승덕에게 무관심하다. 일반 언론과 개신교 인터넷 언론에서도 다룬 이 소식을 두 교계 신문 모두 침묵한 사실은 이러한 교회의 무관심을 잘 드러낸다. 2007년 우리신학연구소가 한국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의 의뢰로 신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대체복무 허용에 찬성하는 신학생은 46%, 반대하는 신학생은 48%로 찬반 의견이 팽팽하였다. 교회 가르침이 명백하게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허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신학생들의 이 같은 의견은 심각한 수준이 아닐까. 더구나 양심적 병역 거부권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알고 있는 신학생은 30%에 그쳤다. 아마 일반 신자 대상 조사를 한다면,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반대 비율과 교회 가르침을 모르는 비율이 더 높을 것이다.
정호승 님의 시 ‘봄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스스로 봄길이 되어 /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한국천주교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고동주, 두 번째 백승덕, 이들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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