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대륙의 어머니 강, 황하(黃河)를 보고 왔다. 세계4대 고도인 서안에서 황토고원을 6시간 넘게 달려 만난 황하의 장관은 상상 이상으로 웅려했다. 저 머나먼 서쪽 청해성 곤륜산맥 한 작은 샘에서 발원해 1000km 이상을 꿈틀대는 용처럼 도도하게 흘러온 황하. 그 거룡(巨龍)이 이 지역의 협곡에 이르러 갑자기 좁혀진, 주전자 주둥이 같은 물길을 통과하며 만들어낸 거대한 말발굽 모양의 폭포 앞에 서자 나는 그 신묘한 풍경에 넋을 잃었다. 너비 40m 낙차 30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황토수 폭포는 자욱한 물보라와 우레 같은 소리의 드라마틱한 맥박을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하며 격렬한 파동을 일으켰다.
나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불끈불끈 솟고 무엇이든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황당한 변화의 기미를 느끼며 반신반의했다. 서울에서의 삶이 한파 속에서 꽁꽁 얼어붙어 움츠러들기만 하고, 태양 아래 새로울 게 뭐 있냐는 심정으로 변화니 도전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시답잖고 공소하게 여겨지던 차에 떠나온 여행이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나이 값을 하느라, 또 이래저래 부여받은 사회적 배역을 소화하느라 짐짓 자세를 가다듬으며 뭔가를 새로이 계획하는 시늉을 하곤 했다. 그러나 언제 한번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을 진실로 지녔던 적이 있던가? ‘당위’에 마지못해 지어낸 신년 계획들이 내 삶의 모습을 별로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회오는 깊어가고, 내 안의 ‘존재’는 끝없는 답보 속에 시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에 유난히 시달리던 올 연말이었다.
그러기에 별 기대 없이,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론 어떤 영감의 순간을 은근히 바라기도 하면서 따라나선 여행이었다. 하지만 영화나 책을 통해서나 알던 그 황하를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었다. 우리의 인솔자는 그 일정을 당일 임박해서야 말해 주었고, 그렇게 멋도 모르고 덜컹거리는 차에 실려 졸며 깨며 다니던 나는 어느 순간 웅혼 웅비하는 거대한 물이 눈앞에 불쑥 등장하자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물은 나를 집어 삼킬 듯 압도하며 고함쳤다.
‘야, 겁쟁이! 네가 삶을 알아? 나는 산과 계곡, 고원과 저지대, 옹달샘과 호수, 대도시와 촌락, 그 어느 한 곳 거르지 않거니와 그 어느 곳에 머물지도 않고 흐르고 또 흐르는 삶이야. 내 마지막 고향인 큰 바다에 이를 때까지. 그러는 동안 나는 빙설과 범람, 한발 등 온갖 형태로 몸바꿈을 하면서 공중으로 언덕 위로 솟구치거나 넘치기도 하고 바위 밑으로 땅 밑으로 숨어들거나 잦아들기도 해. 계속 흘러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뭐든지 다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궁극에 가 닿을 수 있는 법이지. 흘러야 사는 거야. 알겠니. 겁쟁이!’
그랬다. 나는 삶을 몰랐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념이었을 뿐. 보아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인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체험한, 좋고 싫고 기쁘고 슬프고 편안하고 고통스러운, 생의 모든 질료들이 사실은 동일체의 무엇, 즉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어쩌다 좋고 편한 것을 만나면 거기에 머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면 삶의 흐름은 정지되게 마련인데 그걸 모르고 더 좋은 것만 찾아 용을 써 본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황하는 물 10에 모래 6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이 되어 이 진섬협곡의 좁디좁은 물길을 견디며 흐르고 또 흐른다. 나처럼 협곡에 갇혔을 때 어둠 속에서 비르적거리며 생의 지리멸렬을 한탄하며 주저앉았다면, 그 뒤에 올 장엄한 폭포의 영광을 결코 보지 못했으리라.
석양빛을 받아 용비늘처럼 휘황해진 몸을 뒤채며 황하는 내게 다시 한번 일렀다. ‘그래, 흘러야 한다. 좋건 싫건 다 떠안고 흘러라. 좁은 길은 좁은 길대로, 뒤틀린 길은 뒤틀린 길대로, 척박한 길은 척박한 길대로 너의 모래짐을 걸머진 채 머물지 말고 흘러라. 그렇게 흐르다보면 언젠가 너의 본향에 가 닿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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