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사건이 뒤늦게나마 해결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천주교는 특히 많은 애를 썼기에 더욱 기쁩니다.
그러나 용산 사건은 우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이 문제들이 또한 해결되지 않는다면, 용산 사건은 ‘1회용’이 될 것이고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한 많은 이들의 고뇌도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용산 사건은 우선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철거민 문제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는 1987년에 상계동 철거민들이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지낼 때를 뚜렷이 기억합니다. 그 일을 계기로 고 김수환 추기경의 깊은 관심과 더불어 서울대교구에서는 빈민사목위원회를 만들었고, 다른 여러 교구에서도 각자 교구 안의 빈민 문제에 좀 더 직접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천주교회의 사회교리 전통이 바탕이 됐지만, 20년이 넘는 이 실천의 경험이 2009년 용산 사건을 맞아 서울대교구, 나아가 한국교회 차원에서 분명한 대응을 하기에 이른 가장 중요한 내적 배경입니다. 서울과 수도권에 갈수록 높고 호화로운 아파트가 늘어나는 속에서도 빈민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또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30억 원이라는 보상 규모를 볼 때는 ‘빈민’ 문제가 아닌 것처럼도 보이지만, 이러한 해결방법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1회적 해결책으로 보이고, 그러므로 용산 문제의 근본 원인인 빈곤과 극단적 부의 추구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보다는 오히려 가려질 위험이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양극화되면서 빈민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보릿고개를 넘던 농촌의 빈농 문제는 도시의 소년소녀 가장, 독거노인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서울 구로공단이 디지털 단지라는 멋진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그곳 가리봉동에서 청년 노동자들이 살던 ‘벌집’이 지금은 곳곳에 흩어진 고시원으로 바뀌었고, 오히려 그 공간은 더 좁아졌습니다.
용산 사건은 또한 한국사회가 얼마나 경제성장만 바라보고 인간을 외면하고 있었는지 절절히 드러냈습니다. 도시 재개발에서 인간이란 그저 비용을 계산하는 한 단위로만 치부됐습니다. 인간은 존엄과 최소한 생존을 보장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적은 비용으로 처리해야 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그것은 파라오의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동원된 히브리인들의 종살이 대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히브리인을 용산에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경제 성장을 인생 최대의 성공 지표로 삼는 모든 이의 모습, 곧 돈의 노예입니다. 용산 사건 자체는 해결됐지만, 돈과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해결돼야 할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부유한 이들도 농촌에서 살던 시절 공동체적 경험과 가치관이 살아 있어서 주변의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크게 기울였지만, 이제는 많이 다릅니다. 설사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학교와 교회에서 배우더라도, 2000년대의 많은 한국인은 ‘소외된 이웃’을 자기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기는, 사회적 화합과 건강한 인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저소득층의 임대주택을 일반 아파트와 섞어 짓도록 법으로 정해 놓아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들이 이것을 거부하고 따로 담장을 치기까지 하는 마당입니다.
인간은 평소에 자기가 본 것, 들은 것, 체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보편적 진리를 배우고 기도해도 이 한계를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한국의 천주교회 신자들은 사회 평균에 비추어 학력 수준이 매우 높고 부유한 편입니다. 전국적으로는 농촌보다는 도시, 서울에서는 강남에 비중이 높습니다. 한마디로 ‘가난하지 않은 이들의 교회’가 돼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개개인의 타고난 선한 성품에만 기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번에 용산 사건에서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돕고 대변했습니다. 그러나 빈민을 낳고 또 확대해 가는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까지 가난하지 않은 이들의 교회가 개입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용산에 대한 교회의 개입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난하지 않은 우리 자신을 위한 위안은 될지언정, 구원은 될 수 없지 않을까요? 하긴, 구원이란 본래 공동체적인 것이니 대지의 잊힌 자, 버림받은 자들이 있는 한 이 땅에 구원은 없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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