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성이 새롭게 깨어나는 시기에 접한 글이나 말로 인해 그때까지 살아온 삶이나 가치관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체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그런 첫 경험은 중학교 시절에 찾아왔다. 존경하고 따르던 국어선생님이 토론 시간에 화두와 같이 던져주신 말씀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상처도 많다.”
그때 선생님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던 걸로 기억된다. 처음엔 ‘정말 그럴까’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 삶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는 금언이 되고 있다.
주위에서 ‘아니, 어쩌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품게 하는 이들을 만난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그런 이들 대부분이 세속의 눈으로 봤을 때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배경이나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에 젖어 살기보다는 자신을 낮춘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아울러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생기지도 않을 아픔이나 상처마저 달갑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거룩하게까지 다가왔던 게 대부분이었다.
얼마 전 다녀온 성지순례 때도 불현듯 예의 사랑과 상처의 함수관계가 떠올라 순례기간 내내 묵상거리로 삼았던 적이 있다. 그 성지가 거룩한 가난을 산 프란치스코 성인의 활동무대였던 이탈리아 아시시라는 점도 묵상에 적잖은 힘을 보태주었던 것 같다. 알려진 대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오상(五傷)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마저 영광이나 자랑으로 드러나게 될까 봐 숨기려 했던 분이다.
‘오상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비오 성인도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간직하고 살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듯 성인들이 오상을 받은 사건은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극치를 이룬 기적이자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수난을 통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알려준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오상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그리스도화를 가능케 해준 영광이자 그로 인한 완전한 해방 체험으로 드러난다.
이런 사랑과 상처의 함수관계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부모님들의 삶만 살펴보아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험한 일도 마다치 않는 평범한 부모에서부터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나, 자식을 구하려 화마에 휩싸인 집에 들어갔다 영영 나오지 못한 어머니의 얘기는 죽음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상처마저 자신의 것으로 껴안는 부모의 사랑을 들려준다. 그래서 한 시인은 이런 사랑으로 인한 거룩한 아픔을 ‘빛나는 상처’라고까지 말하는지 모르겠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도 부모와 자식으로, 형제와 동료로, 때로는 갑과 을이라는 계약 등 수많은 관계 속에 살면서 적잖은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하지만 상처가 그 어느 때보다 아픔으로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필자는 그 까닭이, 상처를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흉’으로만 생각하는 세태에 있지 않을까 한다. 흉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흉이 잡힐까 봐 걱정하고…. 그래서 세월이 안겨주는 자연스런 ‘계급장’마저 흉으로 여기고 지우려 애쓴다.
새해엔 두려움 없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 그로 인해 상처마저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그리스도의 삶을 맛보고 싶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