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일 내내 눈과 씨름하며 투덜대고 살았다. 아침부터 아파트 복도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빗자루를 들고 설쳤고, 외출 시에는 미끄럼방지 바닥을 댄 부츠를 신고도 새색시 걸음으로 벌벌 떨며 다녔다. 장 보러 가서 너무 오른 채소 값에 놀라 가게를 전전하다 그냥 돌아오곤 했고, 도로에서 생긴 이런저런 불상사를 알려오는 지인들의 전화를 받고 함께 탄식하기도 했다. 폭설과 한파가 빚은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요지부동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는데, 20년 넘게 우리 아파트 주위 노변에서 생선과 꽃과 과일을 팔아 온 세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엊그제 집을 나서던 중 얼어붙은 보도에서 넘어질 뻔 하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옷매무새를 바로잡던 내 눈에 불현듯 그 세 할머니가 ‘줌-인’되어 또렷한 이미지로 들어왔다. 퍽 낯설고 의아하게 다가오는 풍경이었다. ‘아, 저이들이 저기 저 모습으로 내내 있었더란 말인가! 장사품목 한번 바꾸지 않고 생선이면 생선, 꽃이면 꽃, 과일이면 과일을 파는 똑같은 일을 하며 20년을 하루같이 살기라니!’ 나는 경이에 찬 눈길로 그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나는 그들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어떤 기억 속 영상에서 언젠가 서해안 눈밭에서 본 토종 선인장을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영하 20˚의 노지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어떤 병충해도 스스로 이겨낸다는 강인한 생명력의 식물, 천년초! 세 할머니는 온실 속에 사는 우리 곁에서 마치 천년초처럼 노지의 겨울을 살아내고 계셨던 것이다.
어릴 적 고향마을에 첫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아이들은 모두 밖으로 뛰쳐나와 강아지처럼 뒹굴며 놀았다. 어떤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어떤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눈썰매를 타고, 어떤 아이들은 이리저리 내달으며 이유 없는 함성을 지르곤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눈 놀이도 시들해져서 추운 바깥보다는 따스한 집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찾곤 했다. 칼바람이 몰아치고 고드름이 처마에 두둑두둑 달리는 엄동설한에 밤이나 낮이나 바깥의 제자리를 꼼짝 않고 지키는 것은 아이들이 첫눈으로 제 집 마당에 만들어 세운 눈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새로운 놀이에 정신이 팔려 눈사람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춘이 지나고 슬슬 해빙이 되면서 눈사람도 시나브로 녹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엔가 무심코 눈길을 줬을 때 그것이 있던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묘하게 짠한 느낌이 일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상(無常)을 숙고하기에 너무 에너지가 넘치는 존재다. 눈이 녹으면서 무르고 부드러워진 땅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놀이들의 유혹은 아이들의 의식에서 눈사람 따윈 까맣게 지워버렸다.
20여 년간 한 동네에서 아침저녁 마주쳐 온 세 할머니들도 어느 날 그 눈사람처럼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출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나는 아이처럼 무심해도 되는 걸까? 그들이 사시사철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 준 덕에 나는 경조사에 꽃을 갖춰 가고, 밥상에 생선 반찬을 올리고, 싱싱한 과일을 아무 때나 구해 먹고 하는 일들이 수월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그 삶을 어떻게 지탱해 왔을 지에 대해 한 번도 관심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시에 나오는 표현으로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이란 것이 있다. 그러한 아이의 천진성은 사라지고 무책임성만 남은 것이 어른이 된 이후의 내 모습이 아닌가 싶어 부끄럽다.
귀갓길에 고등어자반 한 손, 귤 한 봉지, 국화 한 단씩을 사자 깊은 주름 사이로 피어나는 그이들의 은근한 미소에서 삶에 대한 책임감으로 숙성된 ‘어른’ 꽃의 향기가 느껴진다. 겨울 혹한 속에서도 인간 천년초들은 얼지 않는 항심(恒心)의 꽃을 피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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