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26일이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왜 이런 걸 들먹거리는가.
모두 나라 잃은 슬픔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슬픔과 부끄러움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우리가 얼마나 민족적 자존심, 혹은 국민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다.
수출고나 국민소득의 증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민족적 자존심 혹은 국민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어떻게 지키고 보존하고 있는지, 특히 우리말과 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면서 지켜가고 있는지, 머리를 세차게 한번 흔들고 생각해야 한다.
이른바 세계화의 바람이 한 해가 다르게 드세어지면서 우리 고유의 모든 것들이 세계화에 매몰·멸절되고 있다. 세계화를 막무가내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세계화를 핑계 삼아 지금까지 지켜온 우리 고유의 전통이나 문화, 특히 우리말과 글자를 가벼이 여기면서 이를 천시한다면 이야말로 새로운 국치가 될 것이다. 꼭 나라가 망하는 것만이 국치가 아니다.
국격(國格)이란 말이 요즘 새로 나왔는데, 국격이란 경제력이나 국가적 지명도로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들의 정신이 결정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격이 그 사람의 재산이나 유명도로 결정하지 않고, 사람의 정신적 성숙도, 가치관의 수준이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국격을 논하면서 국격이 마치 경제적 부(富)의 수준이나 국제적인 지명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나라 국민들의 국어생활은 그 나라 국민들의 정신상태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그런 정신 상태가 곧 국격과 관련된다. 전통 깊은 문화국의 국격이 높은 것은 그 국민들의 자국어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큰 데 따른 결과다.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선진국과 중국 등이 그 좋은 보기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한문을 숭상한 나머지 훈민정음을 폄하하고 경멸했던 것을 우리가 지금 사대주의라고 나무랄 자격이 있을까.
결국 국격은 그 국민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결정한다. 그런데 우리는 진작부터 국어생활이 망가지면서 드디어는 망국적 수치(羞恥), 즉 국치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대처방안에 대하여 골몰해야 할 위치에 있는 지도층조차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나의 이러한 말이 꼭 영어바람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기현상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도층이나 서민 대중들이 우리말 자체를 우습게보고, 우리 글자와 문장을 너무 쉽게 보려는 현상이 온 국민들의 뇌리에 꽉 차있다. 국민들이 영문 철자 하나 틀린 것은 크게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우리 기초 맞춤법 틀린 것은 예사로 여긴다.
대중적인 각종 영상물의 한글 자막이 그 보기다. 하면 다 말인 줄 알고, 쓰면 다 글인 줄 안다.
‘반소매’ 옷을 ‘반팔’이라고들 한다. 팔이 반이면 장애인이다. 왜 소매와 팔을 구별 못하는가. 반소매가 반팔이라면 반바지도 ‘반다리’로 써야 한다. 신문사는 물론이고, 방송국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반팔’이란 말을 쓰고 있다.
또 하나, 뜻도 국적도 모를 외래어(외국어 포함)를 왜 그리 좋아할까. 여태 써오던 상호도 외래어로 고치고, 새로 짓는 아파트 이름은 거의 외래어여서 어렵기 한량없다. 우리가 누구이며 여기가 어느 나라인가? 우리에게는 말도 없고 글자도 없는가. 정신 나간 모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뜻있는 외국인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지도층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그릇된 국어생활부터 바로잡아나가야 한다. 이러한 국민적 자존심이 곧 국격의 핵심이다. 나라 잃은 국치 100주년, 그러나 국치는 과거사가 아니고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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