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뀐 지 며칠이나 된다고 한 살 더 먹은 티가 새록새록 드러난다. 머리카락도 더 빨리 세고 방향감각도 더 둔해 지고 숫자 계산도 더 더뎌졌을 뿐더러, 피로나 숙취로부터의 회복도 이전 같지 않다. 이런 소소하지만 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들 중에서 가장 난감한 것이 기억력의 급감퇴이다.
누구나 중년 이후면 겪게 되는 현상이라지만,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그날 할 일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 수첩이 방점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어있다면 증세가 좀 심각한 게 아닐까? 실제로 메모를 해둔 수첩을 찾아 가방을 뒤지니 수첩 자체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온 집안을 뒤진 끝에 포기하고 아침밥이나 하려고 전기밥통을 열다가 그 안에 찐 가지처럼 얌전히 놓여 있는 수첩을 발견한다. 이상 한파와 폭설로 아무리 채소가 귀하다지만 수첩을 쪄먹으려 했을 리는 만무한데 이게 웬 일? 간밤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수첩을 펴서 약속을 적어 넣던 기억까진 나는데, 그 이후의 내 행동거지가 봄날 아지랑이 속 풍경처럼 가물가물한 것이다. 창피한 마음에 누가 알까 잽싸게 수첩을 챙겨 거실로 나와 메모를 뒤져보니 중요한 일이 예닐곱 가지나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어찌 이런 일이? 망연자실해 앉아 있자니 남편이 묻는다. 뭐 낭패 본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동병상련의 위로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실직고 하니 되돌아온 말. 그러게 몇 안 남은 뇌세포 관리 잘 하라 했잖아. 지난 연말 술자리가 잦았던 그가 한동안 약속이나 물건 둔 장소를 까맣게 잊거나 헷갈리곤 해서 ‘취매(醉 )’라 진단하며 놀리기를 즐겼는데 그 갚음을 받는 셈이다. 뭐라 한 마디 되쏘아줄 묘언을 찾는데, 남편이 뜻밖에 진지한 화두를 꺼낸다.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에 자리를 내주느라 지나간 것들이 머물 새 없이 빠져나가버리는 우리 부부 공통의 딜레마에 던지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은 내게 서양 철학사에서의 어떤 길항(拮抗)을 상기시킨다. 니체는 현재의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역사적 인간들은 세상에서 불행한 삶을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행복해지려 한다면 망각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반대로, 플라톤은 진리의 인식이란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직관했던 우리의 본향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플라톤 철학이 기억을 중시한 반면 니체 철학은 망각을 중시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철학자의 주장에서 각각 취하고 싶은 요소가 있지만 굳이 선택을 하라면 니체 쪽으로 기울 것 같다. 그 이유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이상으로 너무 ‘기억해야 할’ 것이 많아진 세상에서, 행복은 둘째 치고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망각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신 데는 어린이들이 망각의 천재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어린이들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로지 현재에 충실함으로써 ‘행복해지기’에 능한 존재인 것이다.
시각을 달리해 본다. 밤 사이 빡빡한 이튿날 일정을 컴퓨터의 ‘딜리트’ 키 누르듯 말끔히 삭제시킨 나의 뇌가 어떻게 보면 충실히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의 그 참담한 건망증도 사실 과부하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자구책이 아닐까. 착실히 나빠지고 있는 기억력을 슬퍼하지 말자. 좀 덜떨어진 듯 보이더라도, 또 설령 허술한 기억 때문에 하는 일에 더러 차질이 빚어지더라도, 니체의 표현처럼 불행한 ‘역사적’ 인간이 되느니 행복한 ‘비역사적’인 인간이 되는 게 낫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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