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의 지진 참사 현장에서 들려오는 온갖 불행한 소식을 접하며 일종의 체증과도 같은 압박감에 부대끼며 지내는 나날이다. 책상 앞에 붙여놓은 한 아이티 소년의 사진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에게 무언의 질타를 보낸다. 참사 현장에서 여남은 살 돼 뵈는 소년이 피에 젖은 찢어진 티셔츠를 입고 머리와 얼굴은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어딘지를 쏘아보는 사진이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그 소년의 기묘한 눈빛에서 세상을 향한 무언의 외침이 읽힌다. ‘우리가 이렇게 비참해도 당신들은 괜찮은가요?’
세계 각국에서 구호의 손길이 답지하고 있지만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아이티는 구조적 빈곤과 만성화된 정치 불안으로 어떤 희망의 약속도 대다수 국민에게 공소한 메아리일 뿐이다. 수 세기동안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804년 어렵게 독립을 쟁취했으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로도 서구 열강들의 금융 제재, 점령 통치, 내정 간섭 속에서 장기간의 세습 독재 통치와 수십 차례의 내부 쿠데타를 겪으며 아이티의 민생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처지가 되었다.
아이티의 전(前) 대통령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의 저서 「마음의 눈들」에 보면 저자가 어린 소녀와 나누는 이런 대화 나온다.
“너는 콜라가 좋으니, 술이 좋으니?”, “난 주스가 더 좋아요.”
이것은 상대방이 제시한 두 가지 선택안중 어느 것도 아닌, 제3의 선택을 만들어내는 한 소녀의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방식을 드러낸다. 아리스티드는 거기서 아이티가 가야할 길에 대한 영감을 받는다. 그 길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창조해야 할 제3의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유한 나라들이 제시하는 해결책과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가난의 존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그 제3의 길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리스티드는 해방신학을 설파하며 빈민사목을 하던 사제였으나, 대통령에 당선된 후 성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여러 차례 집권과 실각을 되풀이하는 동안 아이티를 침탈하는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 세력에 맞서 개혁적인 노선을 취했으나,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많이 엇갈리지만, 이번 참사를 계기로 읽어보게 된 그의 책에서 한 가지 먹먹한 감동으로 전달되는 것이 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다. 그는 진흙 빵을 구워 먹으면서도 웃음과 유머와 품위와 연대감을 잃지 않는 아이티 사람들이 지닌 영혼의 풍요에서 제3의 길이 태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이티에서 자살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처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날마다 죽음과 맞댄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강력한 생명 에너지가 결집되면 제3의 길이 창조될 거라는 희망을 얘기한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만나는 참사 현장의 소년은 공포와 분노를 넘어 빛바랜 공허가 느껴지는 눈으로 말한다. ‘부유한 20퍼센트의 사람들이 이미 차지한 85퍼센트의 부(富)도 모자라, 가난한 20퍼센트가 가진 5퍼센트마저 호시탐탐 노리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희망을 얘기해야 할까요?’
모순과 불공평, 이해의 대립으로 점철된 게 인간 역사라고 알고는 있다. 하지만 갈수록 커지고 확산되는 빈부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은 불행의 편중은 전 지구적 자연 변화와 더불어 마음에 떨치기 어려운 불안의 파장을 일으킨다. 짐짓 태연한 척 얼마간의 구호 성금을 보낸 후, 뜻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삼겹살을 구우며 제국주의자들을 성토했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아이티 소년의 사진을 대하니 이제 그 눈길이 아예 비수인양 가슴에 꽂혀 통증을 일으킨다. 달리 방법이 없다. 그대로 꿇어 앉아 주님께 SOS를 칠 수밖에.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신 주님, 저이들의 시련이 너무 큽니다. 제발 어떻게 좀 해결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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