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설이 되니 돌아가신 큰 이모 생각이 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우리 가족과 반평생 넘게 함께 살았던 그 이모는 의사였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주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지니고도 많은 양의 가사 노동을 찬송가 가락 흥얼대며 해치우던 이모의 여유 만만한 모습은 아직도 내게 불가사의하게 여겨진다.
여섯 식구밖에 안 되는 단출한 가족 모임이지만 게으르고 요령 없기가 뺑덕어멈 수준의 주부인 나는 명절이 언제나 좀 부담스럽다. 특히 바쁜 도시 일상에서 아침은 서구식으로 간단하게, 점심은 각자 밖에서 해결하는 터라, 삼시 세 때를 ‘풀코스’ 한식으로 장만하느라 부엌에 묶여 살다 보면 사람이란 참 먹기 위해 사는 동물이로구나, 싶어진다. 한 이틀 그렇게 지내다 보면 사흘째쯤은 온 몸이 배배 꼬이면서 슬슬 냉장고 옆면에 붙여 놓은 각종 배달광고 스티커로 시선이 자꾸 가는 것이다. 그럴수록 어린 시절 나의 설날을 더없이 풍요한 시간으로 만들어 주던 이모에 대한 그리움이 어떤 익숙한 향내를 동반하며 솔솔 피어난다.
어린 시절 설날 아침은 언제나 이모가 끓이는 구수한 고깃국 냄새와 함께 열렸다. 그믐날 밤 눈썹 세지 않으려 애써 졸음을 참으며 부엌에서 전 부치는 이모를 안방에서 배 깔고 엎드려 장지문으로 내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결에 잠이 들어 밤새 소복소복 내려 쌓인 눈으로 은빛 천지가 된 새 아침을 알리는 까치 소리에 깨 보면, 마치 한숨도 안 잔 사람처럼 이모는 여전히 부엌에서 음식 장만에 여념이 없었다. 부엌에는 광주리 하나 가득 갖가지 전이 쌓여 있고, 채반에는 어느새 빚어 쪄 놓았는지 주먹만한 이북식 만두가 복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도열해 있는 가운데, 김이 펄펄 나는 가마솥에서 건져낸 먹음직스런 수육을 가지런히 썰어 내고 있는 이모는 마치 수라간 상궁처럼 보였다. 그만치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색스럽고 기름진 음식들이 그득한 그곳은 평소 보던 우리 집 부엌 같지 않고 사극 영화에서 본 대궐 안 풍경처럼 생경하면서도 황홀했다.
그러나 미식의 기대에 부풀어 마냥 군침 흘리며 부엌 문지방에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명절이라도 급한 환자들이 찾아올 수 있어 병원 문을 닫지 못하던 어머니가 진료 채비를 바삐 해 놓고는 아이들을 불러 설빔으로 갈아 입혔다. 머리가 굵은 오빠들은 그냥 새 바지나 새 스웨터 같은 양장 설빔인데 반해 유독 막내인 나에게는 색동 치마저고리를 입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모가 며칠 밤을 새워 만들어 준 ‘명품’ 수제 옷인데, 그때는 왜 그리 그것이 마뜩잖았던지! 하긴 동네에 우리 옷 설빔을 장만하여 입히는 집이 거의 없었기에 혼자서 그 튀는 복장을 하고 성당이고 세배길이고 다니기가 무척 민망했던 것 같다.
하여간 나는 그 알록달록한 명주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풀거리며 미사에 다녀오고 어른들께 세배를 다니면서 듣게 되는 인간문화재급 바느질 솜씨에 대한 많은 찬사를 저녁이면 심통으로 되갚아 주곤 했다.
저녁상에 나오는 왕만두를 죄다 터뜨려서 속은 다 남기고 껍질만 건져 먹어 이모를 속상하게 한 데는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내년에는 제발 새 설빔이 역전 양품점에서 파는 나일론 바지나 점퍼로 대체되길 바라는 심산에서였다. 그 속셈을 알았을 텐데도 이모는 내가 열한 살 때 서울로 전학 갈 때까지 계속 우리 옷 설빔을 성장 정도에 맞추어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 입히는 ‘뚝심’을 발휘해 내 원망을 샀다.
세밑에 쌀가루 같은 눈발이 흩날리는 창가에 앉아 설 상차림을 궁리하다 보니, 이모의 그 요술손이 만들어 내던 건강한 음식들과 자연주의 옷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 옛날 그분의 수고로운 사랑이 떡시루처럼 모락모락 피워 올리던 구수하고 찰진 냄새의 기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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