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의 마지막 날. 10년도 더된 그날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기자는 쓸쓸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발을 맞으며 서울구치소 뒷문께를 서성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던 소리도 정확히 기억난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육중한 철문 한 귀퉁이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길쭉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순간 흐느낌은 주체할 수 없는, 아니 누구도 진정시킬 수 없을 듯한 통곡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살인이라는 사형제도로 23명이 한날 한시에 목숨줄을 놓은 1997년 12월 30일. 차가운 시신이 되어 감옥 담장을 빠져나온 사형수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던 그 이튿날, 하소연 소리도 삼켜버린 울음바다 가운데서 기자도 가슴 속으로 울었다. 아니,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키느라 무수히 하늘을 쳐다보았더랬다. 그날 이후 그 자리를 지켰던 이들과 함께해왔다.
2010년 2월 25일, 사형수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이들이 헌법재판소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만큼은 숱한 목숨을 사지로 내몬 사형제라는 괴물의 마지막을 보았으면 하는 일말의 희망으로 주체하기 힘든 표정들이었다. 재판장이 판결 주문을 읽어내려 가는 시간은 채 20분도 되지 않았다. 숨죽이던 방청석에 형언할 수 없는 술렁임이 일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선고 직후 누군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 날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애초 사형제는 민주국가가 걸치기에는 낡고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다시 그 옷을 껴입고 부자유스럽게 살아가길 강제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 형벌론의 주춧돌을 놓은 체사레 베카리아는 “공공의 의지의 표현인 법이 스스로 혐오하고 처벌 대상으로 삼는 살인을 저지르고, 시민에게는 살인을 금지하면서 공공연히 그것을 명하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언제까지 반복될지 씁쓸하기만 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