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인의 믿음이야기(마태 15, 21-28)에는 나(우리)와 너(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타의 차별과 경계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이 이야기를 태생부터 차이가 있는 우리 사이에 현존하는 외국인(특히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민여성들)들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로 삼고자 한다. 물론 성서학자로서의 해석이 아니라 실무 현장 안에서 복음을 살아가려 애쓰는 한 사제의 묵상이요 관찰이다.
예수께서는 치유를 청하는 그 어떠한 사람의 청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마귀 들린 자, 소경, 죽을 정도로 아픈 사람을 포함하여 예수께서는 모든 이의 청을 들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에 자신의 딸을 치유해 달라고 외친 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분명히 그녀의 외침을 들으셨을텐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녀가 여성이고 예수께서 사셨던 시대의 사회에서 여성은 눈에 보이지 않고 조용하였으며, 분명 예수님과 같은 남자에게 치유와 가르침을 청하지 않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녀가 예수님과 같은 유다인이 아닌 가나안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유다인이 불경한 자로 경멸한 외국인이요 이교도인 ‘Syrophonecian’ 출신이었다(마르 7, 2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 이는 예수님께서 애원하는 여인을 무시한 것이 바로 그녀가 유다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위해 예수께 간청을 드린 로마 병사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루카 7, 1-10). 또한 복음에는 병자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경계선을 넘어서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바리사이들로부터 안식일의 율법규정을 어겼다고 손가락질 받을 만큼.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께서 그러한 행동을 보이신 것일까? 다양한 추정이 가능하겠지만, 예수님의 시대에 외국인과 여성은 유다인에 의해 종종 괄시받고 모욕당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시대뿐 아니라 현재에도 많은 외국인들(특히 육체 이주 노동자들)과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적 부조리, 경제적 불평등과 차별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예수께서 그녀를 인지하는 것을 거부하시고, 그녀가 보이지 않는 듯 행동하심에서, 다수의 문화에서 영구한 세월을 살아가는 소수 사람들의 고단한 체험이 반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분 앞에 무릎 꿇으며 그저 예수께서 많은 이들에게 베푸신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고 더욱 모질게 대답하신다. 그 당시 유다인들은 그들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라 여겼으며 다른 이들을 개와 같이 불결한 외국인으로 취급하였다. 소수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님의 발언은 가혹하고, 무례하고, 경멸적이다. 더욱 가혹해지는 상황에서도 이 이름 없고 어쩌면 과부거나 무시당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딸을 매우 사랑하는 이 여인은 예수께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실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녀는 예수께서 세상을 달리 보시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단지 자신들을 특별하고 선택받은 자들로 여기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수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그녀의 청에 기꺼이 환대하셨다. 그녀의 간절함과 믿음이 이전에 그녀를 다른 이들과 구별 지은 성별과 인종과 지리로 인한 장벽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를 지켜보는 선민 유다인들과 제자들에게는 차별 없는 환대가 하느님의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가슴 깊이 깨닫는 가르침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 성경 말씀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어떠한 제외(인종·성별·민족)도 인정하지 않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파벳의 ‘개(Dog)’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하느님(God)’이 된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는 우리가 사람들 안에서 개를 보기도 하느님을 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느님의 사람인 우리만이라도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나그네(이방인)에 대한 아브라함의 환대를 지속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마땅하고 옳은 일이로소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