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한번도 가보기 힘든 해외 성지순례를 필자는 운좋게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물론 내 돈 들여 간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럴만한 형편도 안되거니와, 대부분이 항공사의 초청 팸투어나 순례인솔자(‘티시’라고도 부른다)로 동행한 것이다. 운이 좋았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톨릭 해외 성지순례라면 흔히들 이집트-이스라엘 코스를 기본으로 꼽는다. 이탈리아나 시리아, 요르단 일정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대희년을 앞둔 1999년 12월, 처음 이집트-이스라엘 순례를 경험한 뒤로도 두 번을 더 갔다. 그땐 바티칸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이자 활동 무대였던 아시시도 둘러보는 호사를 누렸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시작하여 육로로 이스라엘 입국까지의 순례는 구약이 주 무대다. 핵심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광야생활을 따라 가는 ‘광야의 여정’이다.
4년 전 순례의 기억이 생생하다. 하루 종일 광야를 지나, 다음날 이른 새벽 시나이산을 오르기 위해 머물 산장을 지척에 두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낸 모세와 여호수아가 아말렉족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는 바로 그 계곡에 다다랐다(탈출 17,8-14). 그곳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이집트 콥틱정교회 소속의 봉쇄 관상수녀원이 있다. 앞선 두 번의 순례길에선 그냥 지나쳐 못내 아쉬웠다. 세 번째 순례길에 드디어 수도원을 둘러볼 기회가 찾아왔다.
봉쇄수녀원 내부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20여 명이 둘러앉으면 꽉 차는 정원에서 순례단은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도, 순례자도 감격스러움에 목이 메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마른 잎들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깊은 정적을 깨웠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격스러웠고, 눈물을 흘렸다.
이콘과 성화들로 장식된 자그마한 성당은 수도공동체의 삶을 드러내듯 소박함과 투박함이 묻어났다. 한켠에서 미소로 지켜보던 수녀님. 아마도 순례객을 위해 수고를 감수하신 것이리라. 일정에 쫓겨 서둘러 성당을 나오며 수녀님과 눈이 마주쳤다. 궁금증이 일었다. 아니 그냥 그렇게 이별(?)하기가 너무 아쉬워 머뭇거렸다.
지극히 짧은 순간 마주쳤던 그 미소와 눈빛. 무척이나 경건하면서도 안정되어 보였던 그 자태가 참 예쁘다고 느꼈다. 베일(수녀님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과 수도복에 싸여 얼굴만 겨우 보일 뿐이지만, 큼지막한 눈망울에 오똑 선 코와 가냘픈 입술이 마치 미모의 외국 배우를 보는 듯했다.
버스에 올라 생각에 잠겼다. 광야에서, 돌과 바람뿐인 그곳에서 저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 오늘 만남이 살아생전 다시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랴. 이 무슨 인연인가. 그토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과 나를 이어주는 고리에 전율을 느꼈다.
세간에 화제가 됐던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면서 그때 일이 떠올랐다. 영화 중간 중간 자막에 나오던 성구(聖句) 중에 유독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주께서 저를 이끄셨으니, 제가 이곳에 있나이다….”
은사이셨던 고 박석희 주교님이 조카 신부에게 남기셨다는 기도 한 구절이 떠오른다.
“조용히 사랑하고, 조용히 복종하고, 조용히 기도하고, 조용하고 정직하게 말하고, 너그러이 생각하고 말하고, 깊은 인상을 남기려 한다거나, 똑똑한 자인 것으로 보이지 말게 하소서. 오 하느님 아버지. 우리 가운데 한 어린이를 보내주셨으니, 나를 어린이가 되게 해주시고, 순수한 어린이가 되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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