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딸아이의 졸업식이 있었다. 꽃다발과 사진기를 챙겨 아이가 지난 5년간 소속되어 드나든 학교 캠퍼스에 서니 여러 가지 감회가 밀려왔다. 스물일곱 해 전쯤 아이 아버지가 될 사람과 내가 그 대학 부근 막걸리 집에서 데이트를 할 때는 우리도 아직 ‘아이’였기에 2세 교육에 대한 생각 같은 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었다. 파전과 막걸리 주전자를 놓고 헤겔과 체 게바라, 타고르와 라즈니쉬, 마티스와 로드코, 헉슬리와 마르케스를 오가며 종횡무진 ‘이데아’의 숲을 헤집고 다닐 때였으니, 기저귀와 도시락, 입시와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삶의 구체적 현실인 자녀 양육을 화제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철없던 ‘반(半) 아이’ 남녀가 실제로 자식을 보았을 때 느낀 당혹감은 본능적 충족감 못지않게 컸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잔치는 끝났다’는 느낌에 신생아실에서 입을 오물거리는 빨갛고 조그만 존재를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딸아이는 초보 부모의 긴장과 염려에 아랑곳없이 제 자랄 대로 쑥쑥 자라나 부모가 간섭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너머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화분에 뭔지 모를 씨 하나를 심었더니 처음 보는 넝쿨식물이 올라와 벽을 타고 지붕 너머까지 뻗어가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가지도 쳐주면서 공들여 가꾸고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라난 모습을 보니 우리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나서 자라는’ 자생식물이었다는 발견에 어리둥절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이 아버지는 외국 유학 시절 그곳 시립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느라 우리나라에서라면 필요치 않을 각종 의료검진을 받은 후 아이들 놀이터의 사고방지 반장을 해야 했고, 어미인 나는 학교식당이 마련되지 않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아이를 보내 나날이 도시락을 싸야 했으며, 사교육 부담을 비켜가기 위해 밤 11시까지 야간자습을 시키는 고등학교에 보내느라 코앞 동네로 이사 가는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는 등, 대한민국 평균 부모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기본 도리는 다 했다. 아이가 대학 진학을 앞두었을 때 진지하게 함께 대화하고 고민해 지금의 전공을 정할 수 있게 도왔으며, 입시 준비에 묻혀 유보되었던 사춘기 방황을 대학에 들어가 ‘오춘기’로 뒤늦게 겪어내는 동안 상처 받고 화해하는 과정을 함께하려 애썼다.
아이가 모스크바로 언어연수를 위해 난생 처음 부모 품을 떠나자 걱정과 허전함을 달랠 길 없어 된장, 고추장 따위를 싸들고 술 마신 조종사가 모는 러시아 비행기에 목숨 맡기며 현지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졸업 사진들에 담긴 딸아이의 밝고 환한 모습을 컴퓨터에 옮기노라니 새롭게 마음의 귓전을 파고드는 것이 있다. 딸아이가 지금의 그 자신인 것은 우리가 부모로서 해준 모든 것 이전에 그렇게 이끌어 가기로 하신 하느님의 계획이 있었던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예정론적인 얘긴지 모르겠으나, 그 아이가 한 인간으로서 스물 몇 해 동안 겪어온 여러 곡절 중에는 위험한 고비들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 세상에서 나름대로 제 몫을 할 것 같은 믿음을 주는 젊은이로 성장한 것은 그렇게 되기로 계획된 덕분이 아닐까? 이것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묘연한 영역이기에 자식으로 인해 마음 태운 순간들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다 맡겼으면 아이도 우리도 좀 더 편안했을 텐데….
딸아이가 일곱 살 땐가, 하굣길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발이 묶여 남의 집 처마 밑에 서 있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변덕스런 날씨를 짜증스러워하는 어미에게 타이르듯 일러주던 말. “괜찮아. 하느님이 모두 다 살게 하시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딸아. 그분이 그리 계획하시니 네가 잘 자라났구나. 고맙습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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