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층 맛 들여 보는 TV 드라마가 있다. 워낙에 멜로물엔 취미가 없고 액션물이나 사극 등 활극적인 요소가 있는 드라마나 좀 보는 편인데, 이 ‘추노’란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고부터는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로 열렬 시청자가 됐다. 드라마 방영 요일에 외출할 일이 생겨 놓치게 되면 자정이 가까워야 재방송이 오르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챙겨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도 외출에서 늦게 돌아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인터넷 재방송을 보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드라마에 집착하는 이유가 뭔가 의아해졌다. 화려하고 박진감 있는 액션, 눈을 즐겁게 하는 미남미녀 출연자들과 감칠맛을 더해주는 조연 배우들의 명연기, 복선을 깔고 다층 구조로 전개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 등 이른바 명품 드라마의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되겠다. 하지만 나의 ‘원초적’ 감성을 깊숙이 건드린 그 무엇은 따로 있는 듯하다. 드라마의 주요 인물들이 현실전복을 꿈꾸는 반골(反骨)이라는 점, 그것이 내게 가장 큰 흡인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집안 노비의 배신으로 멸문한 양반가문 출신의 위악적인 휴머니스트 추노꾼, 양반세상을 뒤엎고 상민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노비 명포수, 노비였다가 오라비가 돈으로 산 가짜 양반 신분을 지닌 채 진짜 양반 출신인 도망노비의 아내가 된 여인, 사당 출신으로 우연히 추노꾼에게 구출돼 그와의 결합을 꿈꾸며 따라다니는 떠돌이 처녀, 화적질을 하며 살지만 도망노비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산적 두목…. 이들은 모두 제 처지를 바로잡거나 또는 뒤집어엎기를 원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모반을 꾀하거나 그것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모험을 불사하는 저항과 반란의 돌풍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그들은 비천한 생활일지언정 그냥 생존해 있을 수 있는 선택 안을 포기하고 죽음을 담보로 한 자주적 실존을 선택한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 같이 살 수 있는 그런 삶을 찾아 현재의 안전하지만 비루한 생존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혁명이 발화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나를 나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삶은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는 삶을 버리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구전설화 중에 ‘고만이 이야기’란 게 있다. 고만이는 가난한 집에 업둥이로 들어와 쌀독에 들어앉아 곡식을 다 축내서 그 집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이상한 짐승의 이름인데, 백해무익한 고만이를 장에 내다 팔았더니 그 짐승의 새 주인이 된 사람은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다. 알고 보니 가난한 집에서는 그저 끼니나 거르지 않는 ‘고만한’ 삶을 목표로 삼아온 것과 달리, 새 주인집에서는 부자가 되길 꿈꾸며 그 짐승을 잘 대해 주었더니 먹는 족족 금 똥을 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을 ‘항상 고만한 정도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은 ‘고만하게 있겠다는’ 자기 암시였던 셈이다. 복은 제 그릇대로 받는다는 고전적 주제의 이야기지만, ‘자유’라는 인간 실존의 존엄한 목표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다면 주어질 준비가 되어 있어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자유다. 그런 측면에서 ‘추노’의 인물들은 가난한 집 고만이에 해당하는 노비의 삶을 버리고 부잣집 고만이에 해당하는 자유의 삶을 꿈꾸며 투쟁하는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종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드라마의 결말이 궁금하다. 실제 기록된 역사와 일치되는 요소를 그다지 많이 기대하기 어려운 허구의 창작물인 만큼, 제작진이 의도하는 결말은 시청자, 즉 대중 여론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 되겠기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바라는 결말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 삶을 찾아 나서는 쪽이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해피엔딩의 형태가 안 될 수도 있겠다. 역사상 자유를 향한 투쟁에는 늘 혹독한 희생과 대가가 따랐으므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