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은 정말 이상하다. 가뜩이나 나라 안팎의 어지러운 정세와 눈에 띄게 위축된 서민경제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탄식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그 옛날 오랑캐 땅에 시집간 한나라 미녀 왕소군(王昭君)이 아니더라도, 요즘처럼 궂은 날씨 속에 뭐 하나 속 시원히 풀리는 것 없는 막막한 현실을 견디노라면 봄의 실종을 한탄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마련이다.
며칠 전에도 황사바람 속에 ‘오랑캐 땅’에서 고향의 봄을 그리는 심정으로 부옇게 퇴색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듣는가 싶더니 금세 진눈깨비로 변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도 눈도 아니고 진눈깨비라니! 나는 하늘을 향해 눈을 흘겼다.
20대 푸르른 시절부터 봄비는 감미롭게 귓전을 파고드는 정든 이의 속삭임 같아 좋아했고, 봄눈은 마음을 들뜨게 해주는 축제 전야의 교향악 리허설 같아서 좋아했다. 하지만 진눈깨비는 물도 얼음도 아닌 것이 지저분하고 청승맞단 생각에 딱 질색이었다. 더러 진눈깨비의 그 중간적 성질을 분위기 있다며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매사 이도저도 아닌 것을 싫어하는 성미라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진눈깨비를 퍼부어대는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잖아도 우울해서 뭔가 기분전환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궁리하던 중에 대기 중의 지저분한 황사 먼지를 다 끌어안고 떨어지는 그 을씨년스러운 ‘물 얼음’은 내 기분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나는 급성 무기력증에 빠져들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한없이 가라앉아 마감을 앞둔 원고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저녁상에 올릴 자극적인 기분전환용 메뉴를 생각하다 냉동고에서 꺼내놨던 얼린 낙지를 도로 넣어둔 후, 코트를 들쳐 입고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우산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 진눈깨비를 느끼며 목적 없는 발길을 내딛다보니 어느덧 한강 공원이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강변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유람선 선착장에 붙은 카페로 가서 커피를 한 잔 시켜 놓고 강물을 내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나와 마주 보이는 카페 홀 건너편에 중년의 남녀 한 쌍이 각기 나처럼 차 한 잔을 놓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십 여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각자의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싸웠을까?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강에까지 와서 왜 아무 대화도 안 하는 거지? 십분 쯤 더 흘렀을까, 그때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남녀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갔다. 직업적인 본능이 살아난 내 눈이 그들 뒤를 좇았다. 놀랍게도 그때까지 결별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 같던 그들은 우산을 하나만 펴서 쓰고 서로 다정하게 감싸 안은 채 진눈깨비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수첩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그 사이 머릿속에서 소설 한 편이 구상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목은 진눈깨비의 시간. 화합하지도 결별하지도 못하는 관계, 비처럼 관계 속에 완전히 융합되어 같이 흐르지도, 눈처럼 제각각 자유롭게 흩날리지도 못하는 관계…. 많은 남녀의 사랑이 그러한 어정쩡한 상황, 진눈깨비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 더구나 흔들림 없이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그 진눈깨비의 시간을 잘 견뎌내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눈깨비는 물의 성질과 얼음의 성질을 함께 지니면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언제라도 비나 눈으로 바뀔 수가 있다. 비가 될까 눈이 될까 결정하는 과정에서 망설이는 상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이 불확정성의 단계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예 모든 결정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망설임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숙고하며 성장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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