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不信) 시대다.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기밀사항인지 혹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공개하지 않는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심받기 싫어 더 내놓으면 ‘숨긴 것이 또 있다’고 따진다.
생수 소비가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은 수돗물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탓이다. 환자는 의사의 말을, 학생은 교수의 말을 믿지 못한다. 학력을 위조한 가짜 의사, 가짜 교수일지도 모를 일이다. 대형 마트에서 먹을거리를 살 때도 덥석 주워 담지 못한다. 이러다가는 유명 백화점의 명품관마저도 의심할지 모른다.
그만큼 지불 비용도 크다.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대뇌피질의 100억 신경세포체 뉴런(neuron)들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속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지 못하다 보니, 적을 두지는 않되 목숨을 바꿀 만한 친구 역시 포기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어느 캄캄한 밤, 자전거를 타고가다 전조등에 이상이 생겨 점검을 위해 잠깐 멈춰 섰는데, 앞서 걸어가던 여성이 갑자기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날 흉악범으로 오해한 것이다. 불신시대엔 누구나 불신의 대상이 된다.
사회가 삭막해져 가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불신이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말랑말랑 젤리 같은 유들한 가슴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 세상을 아름답다고 하고, 믿음이 넘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런 세상은 소설 속에서나 있는 것일까.
사실 요즘 소설들 중에도 이런 따뜻함과 푸근함을 말하고 있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불신과 배반, 거짓말, 일탈, 성(性)의 탐닉, 싸구려 억지 반전을 위한 과장, 소름 돋는 엽기가 대세다.
사실 불신은 동물 세계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양은 늑대를, 숫염소는 표범을, 송아지는 사자를 불신한다. 암소와 곰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인간만이 불신(不信)을 신(信)으로, 믿음으로 바꿀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대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군에 패한 페르시아군이 배를 타고 퇴각할 때, ‘쿠나이게이로스’라는 그리스 군인이 끈질기게 끝까지 추격했다. 그가 페르시아의 배에 매달렸을 때, 한 페르시아 군인이 칼을 들어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그러자 그는 다시 왼손으로 배를 잡았다. 군인은 왼손마저 잘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로 배에 달라붙었다.
불신시대 일수록 매달려야 한다. 어디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하늘에 매달리고, 부활 희망에 매달려야 한다. 매달리는 팔에 힘이 빠졌다면, ‘쿠나이게이로스’처럼 이로 물고 늘어져야 한다.
나는 믿는다. 인간만이 불신의 시대를 믿음의 시대로 바꿀 수 있다. 신(神)을 신(信)해서 신(新)되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달라진다.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는 늑대와 양과 새끼 양이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는 세상을 예언했다.
이사야는 이 모든 동물들을 어린아이가 몰고 다닐 것이라고도 했다.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을 것이라고 했다.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을 것이라고 했다(이사 11,6-8 참조).
이사야는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이야기했다. 이 위대한 예언자는 언젠가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어 살아가는, 불신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사야의 예언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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